한국의 땅이름
1. 한국 지명의 특징
이름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지는 것으로 자칭 또는 타칭된다. 예부터 이름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물건에도 있고 땅에도 붙여져 왔다. 사람의 이름은 성명이요, 땅의 이름은 지명이다. 만약 사람에게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다면 대단히 불편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토지에 지명이 없다면 생활에 막대한 불편과 혼란이 있을 것인데, 일반적으로 장소의 지형, 역사, 풍속 등 유래가 담겨져 있다. 우리 나라 고대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로 된 것이 많아 고유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한자가 우리 나라에 유입되기 전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지명이 비록 한자로 표기되었더라도 그것은 소리와 뜻을 빌리는 차음, 또는 차훈하는 이두나 향가 식의 범위에 그쳤을 것이다. 당나라 힘을 입어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AD 668)우리 민족 고유의 지명을 경덕왕 16년(AD 757년)때에 중국식으로 고쳤다. 즉 신라는 우리의 고유지명을 두 음절의 한자식 지명으로 바꿈으로써 고유 지명을 잃어버리고 한자 문화권으로 포함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덕왕 때의 한자식 지명 변경을 우리 역사상 최초의 개악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많으나 필자는 조금 변호를 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우리 나라의 고대 지명이 순수한 우리말로 되어 있다면, 삼국 시대에 삼국이 같은 말을 썼는지, 같다면 한자로 옮겨 적는데 같은 방식이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에는 이에 대하여 전해지는 바는 없고, 어렴풋이 나마 이것을 전하는 문헌은 중국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다. 이에 의하면 부여 말은 부여, 고구려, 백제와 같은 경로를 밟아 이동한 듯 하다. 위 사서는 고구려 말을 부여 말과 같고, 옥저와 예말은 고구려 말과 같다 하였다. 양서 백제전은 백제 말은 고구려 말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저 같다고 말하였을 뿐 무엇이 어떻게 같은지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신라의 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런 비교에 앞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기록한 전승을 살려 보면 동명은 부여국 출신인데 서천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고, 온조는 고구려 출신인데 남진하여 백제를 세웠다. 이것은 민족의 이동을 보여 주는 믿을 만한 문헌 자료이고 위 삼국지의 말에 대한 기록은 위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즉 한반도에는 북방의 부여어 계-부여어, 고구려어, 동옥저어, 예어-와, 남방의 한어계-마한어, 진한어, 변한어-의 두 어군이 존재하였던 바 북방어와 남방어는 방언적 차이를 벗어난 언어적 차이를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백제의 경우, 지배층인 부여족은 피지배층이 한족과 다른 언어를 사용했으며, 부여계를 대표하게 된 고구려어와 한어계를 대표하게 된 신라어 사이에는 극심한 언어적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 중국 사서에 의해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민족의 통합은 물론, 언어의 통합에 하나의 계기가 되어 한반도의 언어는 경주 지방의 말로 비로소 단일어로서 민족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볼 때 삼국 통일 후 행정과 통치의 필요에 의해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언어 문자의 통일이 필요했을 것이고, 통일을 하자면 다른 문자라도 빌려다가 언어를 통일해야 했기 때문에 한자식으로 했음이 불가피했다고 여겨진다. 꼭 사대주의적 사상에 의한 개악이라고 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2차 지명 변경은 통일신라가 망하고 고려 왕조가 서면서이고, 3차 변경은 조선 왕조가 건국되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현재 우리 행정단위의 명칭으로 쓰고 있는 지명은 일제가 1914년 행한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서 4차로 변경 확정된 것이다.
1) 땅의 모양과 관련된 지명 이상과 같은 내력을 가진 한국 지명은 서양 사람들은 도시, 길 등 땅 이름에 개척자나 그 지역에 공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서가 창세기에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또는 “신은 사람을 자신의 모습과 같이 창조하였다”라는 내용은 인간을 신의 대리자로서, 인간을 제외한 자연과 만물은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자연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인간 삶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개발과 개척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지명도 자연히 개척한 사람이나, 기념을 할 만한 이의 이름을 따르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물론 한국에서도 최근에 길 이름에 퇴계로, 율곡로, 세종로, 을지로, 도산로, 고산자로 등 선인의 호를 따른 경우가 있지만, 이는 역사상의 인물이고 그 땅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국민 전체가 공감하는 위인으로 제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에서는 김책시나 김정숙군 같은 지명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공항이나 도시 이름, 심지어는 조그만 길 이름에서도 어떤 개인 이름을 따르지 않고 역사적 이름이나 자연 환경에 관련된 지명에서 유래하는 것은 우리의 자연관이 확고한 때문일 것이다.
2) 불교와 관련된 지명. 우리 나라에 불교나 유교와 같은 외래 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하늘을 숭배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육당 최남선은 그의 ‘불함 문화론;에서 태양, 하늘, 신을 숭배하는 우리의 고대 문화는 ’‘사상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런 고유 민족 종교의 바람은 하늘에는 밝은 세계가 있어서 빛과 더운 기온을 가진 태양이 최고 주재신으로 세상을 안돈하게 한다는 사상이며, 다시 말하면 천․지․인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제천 의식을 행하였다. 이러한 하늘과 인간 세계가 통하는 곳이 바로 큰 산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큰산의 봉우리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하느님과 인간이 통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큰 산봉우리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산의 영역으로 보아서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큰산을 ‘달’(삼국사기 고구려 지명에는 산을 달(達)이라고 적고 있다)이라고 했으며 제천에 있는 박달재도 이러한 지명의 흔적인 것이다. ‘’을 의역한 대자로서 ‘白’을 써서 ‘달’을 백산(白山)이라고 기록하였고, 우리 나라에는 태백산, 소백산, 함백산 등 ‘白’자 계열의 산이 도처에 많은데, 이러한 산은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었다. 즉 민족 신앙의 터는 도처에 많은데, 이러한 산은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었다. 즉 민족 신앙의 터는 산수 수려한 큰 산 밑에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곳이 삼한시대 제의가 행해지던 소도터인 것이다. 산을 숭배하는 뜻의 ‘달’을 의역하지 않고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음역한 것이 배달(倍達)로 표기된다. 그리하여 산을 숭배하는 우리 민족을 배달 민족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소도는 청동기 시대인 부족국가 때에 제정일치의 제의가 행해지던 신성 지역이며 읍간 경계표라 할 수 있는데, 성읍 국가에서 철기 문화를 가진 고대 왕권국가로 발전한 삼국시대에 외래 종교인 불교를 새로운 정치 지배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전통 신앙 중심인 소도 지역에 불교 사찰을 창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큰 사찰인 경우 거의 창건연기설화가 있는데, 그 중 하나인 부석사의 경우를 살펴보자.
<삼국유사>에 부석사 창건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으므로, 이상을 사모하던 선묘가 변한 용이 다시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서,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었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 절을 지을 수 있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지금도 무량수전 뒤에 부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둑의 무리는 아마 외래 종교에 저항하는 소도 터의 집단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민족 고유 신앙은 그 터를 왕권의 뒷받침을 불교에 내주고 백성들 생활 속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전국에는 관음산(봉), 문수산(봉), 보현산(봉) 등의 불교식 지명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와 보살이 우리 땅에 와 계시다는 불국토 사상의 염원이 담긴 땅 이름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산 이름은 불교의 영향이 지대하였으며, 이외에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지명을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1) 보살(菩薩)신앙 불교가 창시된 후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소승(小乘)불교와 불타(佛陀)나 보살의 은공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대승(大乘)불교로 갈라졌는데, 소승불교는 동남아시아 방면에 퍼졌고, 대승 불교는 우리 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에 퍼졌다. 대승 불교는 종래의 수행관에 있어서 자기 해탈을 주장하는 대신 대중의 구원을 선행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소승불교의 최고성자 아라한(阿羅漢)대신에 보살이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했다. 보살은 범어(梵語)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음역인 ‘보리살타’의 준말로 대승 경전에는 관세음(관음 보살, 문수 보살, 보현 보살, 지장 보살, 미륵 보살(미륵보살은 다음에 별도 설명))등 수많은 보살이 있으나, 이들은 석가모니가 아니며 별개의 개성을 가진 개개의 인격으로서, 과거와 미래에 다수의 부처가 있다는 다불사상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보살 중 대자대비를 서원하는 관세음 보살을 신앙으로 하는 관음신앙과 석가모니 불을 좌우에서 협시(脇侍: 좌우에서 가까이 모심)하는 문수보살과 보현 보살을 신앙 대상으로 하는 문수, 보현 신앙이 삼국시대 이래 전승되었다. 양 보살은 언제나 여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돕고 널리 선양하는 으뜸 보살이기 때문에 이러한 보살을 신앙 대상으로 하는 관음사, 문수사, 보현사가 오래 전부터 창건되었으며, 사찰이 있는 산의 이름으로까지 확대되어, 산 이름이 되고 나중에는 마을 이름이 되고 행정 지명으로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북한산 문수사 뒤에 있는 봉우리가 문수봉이며 그 동남쪽에 보현봉이 있다. 울산의 월드컵 경기장이 문수산 밑에 있어 ‘문수 경기장’이라고 명명했다. 이와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 나라의 문수 신앙은 신라의 고승 자장 율사에 의하여 정착되었다. <화염경>에 의하면 중국 산서성 청량산을 문수보살의 상주처라고 하는데, 자장은 문수 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와서 중국의 청량산과 비슷한 지형인 오대산 중대에 적멸보궁을 건립하고 문수 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만들었다. 그 후에 이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청량산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고, 오대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청량리 등도 예전에 청량사가 있던 마을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2) 미륵 신앙 한국 불교에서 ‘미륵 신앙의 성지’로 존숭되고 있는 금산사는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 이름도 절 이름을 좇아서 금산면, 금산리라고 한 것을 보면 무척 오래된 유서 깊은 도량(道揚)인 것을 알 수 있다. 금산사 앞에 큰 사하촌(寺下寸)이 있는데 마을 이름이 용화동(龍華洞)이니,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 신앙의 중심지다운 마을 이름이다. 미륵불은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부처가 될 수기를 받은 후, 현재는 도솔천에 계시다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56억 7천만년 뒤에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서 용화수 밑에서 성도한 다음,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이다.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서 미륵 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閻浮堤: 현세의 인간세계)에 내려와서 제일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륵 신앙에서 보이는 여러 지명이 민중의 염원을 담아서 나타내고 있다. 도솔산, 도솔봉, 두솔산, 두솔봉은 미륵이 현재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 하는 염원이며 미륵산, 미륵도, 용화산, 용화동 등은 미륵 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지명이다. 또한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교화하는 용화회에 참여하여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한 것이 향목(香木)을 해변에 묻어두는 풍속으로 행하여지고 있어 미륵 하생 신앙이 뿌리가 깊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성 삼일포 매향비 및 사천 매향비 등에 이러한 것이 잘 나타나 있으며, 최근에 미 공군 사격 연습장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매향리(화성시 우정면)도 미륵 신앙이 배어 있는 지명이다.
(3) 가야산(伽倻山) 가야산은 전국적으로 7개 정도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것은 해인사를 품고 있는 경상남도 합천과 경상북도 성주에 걸쳐 있는 산과 충청남도 예산과 서산에 걸쳐 있는 산이다. 합천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외에도 우두산(牛頭山), 설산(雪山), 상왕산(象王山), 중향산(衆香山), 기달산(怾怛山) 등 여러 가지가 있고, 예산 가야산도 상왕산, 서우산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가야산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가야산이 있는 합천, 고령 지방은 1, 2세기 경에 일어난 대가야국 땅으로, 신라에 멸망된 뒤로 처음에는 대가야군으로 불렸고, 또 이산이 대가야 지방을 대표하는 산으로 가야국 기원에 관한 전설이 있는 까닭에, 옛날 가야지방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가야산의 주봉이 상왕봉(象王峰)이고 또다른 이름이 상왕산, 설산인 것을 보면 불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범어에서 ‘가야’는 코끼리(象)를 뜻하는 말이고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가야’는 인도 남부의 가야(GAYA)를 음역한 것으로 그 남쪽 30리에 부처님이 성도한 땅, 즉 불교의 성지 부다가야(BUDDAGAYA)의 주요 설법터로 신성시되던 가야산에서 그 이름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야산을 상왕산, 상왕봉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처님이 계신 산이라고 믿고, 또 부처님께서 오시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불국토 사상에서 유래한 이름인 것이다. 이외에도 영월, 평창, 횡성에 걸쳐 있는 사자산, 강화 석모도에 있는 낙가산(국립 지리원의 공식 명칭은 삼봉산이나 삼봉산 밑에 있는 보문사가 관음 신앙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낙가산이라고 부름)순천시 조계산, 영동 지방의 동해시와 삼척시에 걸쳐 있는 두타산, 양산 통도사 뒤의 영취산(국립지리원 공식 명칭은 취서산)등 그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주로 산과 산봉우리의 이름에 많이 남아있다.
3) 유교 사상의 영향에 의한 이름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윤리나 정치 이념이다. 유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서에 고구려에서는 332년(17대 소수림왕 2년)에 대학을 세웠고, 백제에서는 275년(15대 근초고왕 30, 14대 근구수왕 1년)에 고흥이 처음으로 박사가 되어 서기(書記: 역사책인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를 지었고, 신라에서는 682년(31대 신문왕 2년)에 국학을 세웠다. 이런 사실로 보아 유교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통일 신라 후에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문물의 제도를 정비했다. 고려에서는 제 6대 성종(成宗: 960~997)때부터 국자감을 세워서 유학을 가르쳐, 제 11대 문종(文宗: 1046~1083)때에 크게 떨쳤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통치의 근본으로 삼고 백성 교화의 본을 세웠기 때문에, 도읍인 한성과 큰 읍내에 그 사상이 자연히 땅 이름에 배어 있다.
(1) 향교(鄕校) 고려 인종 50년(1127)에 처음 설치하였는데 조선 왕조 때에는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도 하나씩 설치하였다. 부, 대도호부, 목은 각 90명, 도호부는 7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의 학생을 수용하여 문묘와 함께 유학을 가르쳤던 관립 학교로, 서원이 융성했던 조선조 후기를 제외하고는 각 고을의 유학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향교가 있던 곳의 마을 이름은 향교리(鄕校里), 교리(校理), 교동(校洞), 교동리(校洞里)라고 부르는 곳이 많고 또 ‘향교말’ ‘향교골 ’‘교촌리’ 등이 있으며 과천시의 ‘문원동(文原洞)’도 과천 향교가 있어 생긴 마을 이름이다.
(2) 사직동 옛날 중국에서는 새로 건국을 하면 천자나 제후는 단을 세우고 땅의 신인 사(祀)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예를 좇아서 태조가 조선 왕조를 개국한 후 3년(1394)에 궁궐의 오른쪽에 단을 세우고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사직단이라고 하였다. 각 고을에서도 소사단(小社壇)과 소직단(小稷壇)을 세워서 제사를 지냈다. 그 유지에 사직골, 사직단, 사직동이란 땅 이름이 남아있고 현재 동명으로는 서울, 청주, 부산에 있고 부산에서는 동명을 따라 운동장 이름도 ‘사직 운동장’이다.
(3) 효자동 효(孝)는 유학의 근본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이며 나라에서도 항상 그 뜻을 강조하였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는 선조 때 학자 조원의 아들 희신과 희철 형제가 효자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효자골로 불리다가 효자동이 되었으며, 전주, 춘천, 고양시에도 효자동이 있고 전국적으로도 효자리가 많이 있다. 서울 종로구 동대문 안쪽은 성균관 아래쪽이 되고, 사학(四學)의 하나인 동학(東學)이 있던 곳이므로 유학의 대강인 효제(孝悌), 충신(忠信), 인의(仁義), 예지(叡智)의 뜻을 따른, 효제동, 인의동, 충신동, 예지동이 있다. 또한 문을 숭상하는 분위기에서 각 산에 문필봉이라고 불리는 봉우리가 많다.
네 번째는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면서 토지 측량과 함께 대대적인 행정 구역을 개편하여 1914년에 조선시대의 주, 부, 군, 현을 통폐합하여 부, 군(府郡)제를 실시하고 면을 최하의 행정단위로 신설하였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법정 행정 지명의 바탕이다. 이 때에는 평균 두 개의 면을 하나로 통합하고, 두 개의 마을을 새로 리(里)로 하면서 두 지명의 글자를 하나씩 따서 하나의 지명을 만드는 합성 지명을 주로 하였다. 이 때 우리 전체의 지명이 전국적으로 많이 훼손되었는데 다음 양주의 땅이름에서 그 예를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2. 조상의 지리관 - 산경표에 의한 산경도
현재 우리는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 文次郞)가 1903년에 발표한 <조선의 산악론>에 의거하여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땅 속의 지질 구조선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다. 조선 영조 때에 신경준(申景濬)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산경표(山經表)에 의하면 조선시대 우리에게는 강줄기와 내, 즉 물줄기를 기준으로 한 산줄기 개념이 있었다.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이 큰 강의 유역을 이루고, 그로부터 가지친 지맥들이 내와 골을 이루어 삶의 지경을 마련한 것이다. 즉 산과 산이 있으면 그 가운데에 내를 이루게 되니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낳고, 살고, 돌아간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을 산에 묶어두고 살아 온 민족이다. 이 산줄기가 우리 사회, 역사, 정치, 산업, 문화의 모든 분야에 근거가 되었다. 이 산경을 북쪽에서부터 살펴보면 백두대간, 장백 정간, 청북 정맥, 청남 정맥, 해서 정맥, 임진 북, 예성남 정맥, 한북 정맥, 한남 금북 정맥, 한남 정맥, 금북 정맥, 금남 호남 정맥, 금남 정맥, 호남 정맥, 낙동 정맥, 낙남 정맥으로 나누어진다. 즉 우리 문화의 지역적 구분은 도(道)가 아닌 이 산경표에 의하여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예는 땅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 고잔동, 고잔리 인천광역시 남동구에 고잔동, 안산시에도 고잔동이 있다. 이와 같이 ‘고잔’이라는 지명은 동해안에는 없고 서해안 중에서도 특히 경기도 바닷가에서 많이 발견된다. 김포시 대곶면 대명포구 앞에 있는 고잔 마을에서부터 평택시 청북면의 고잔리까지 행정, 법정 지명이 세 개이고 자연 부락의 마을 이름은 열 개가 넘는다. 고잔은 한문으로 高棧(평택시 청북면), 古棧(인천 광역시 남동구)등으로 쓰는데 우리말로는 ‘고잔’ ‘고지안’ ‘고지아니’라고 한다. 우리 서해안은 세계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다. 지금은 간척 사업과 매립으로 해안선이 일직선화 된 곳이 많아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곳이 많지만 예전에 제작된 지도를 보면 해안선의 돌출이 매우 심하였다. 육지가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곳을 곶(串)이라고 하는데 이 곶의 안에 있는 마을을 ‘고지아니’라 했고, 고지아니>고지안>고잔>으로 변하였다. 이 땅 이름만이 포구에 만들어 놓은 다리를 뜻하는 말로 그 땅의 뜻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고잔이라는 지명은 한남정맥과 금북정맥 사이에서만 발견된다.
(2) 노고산(老姑山), 대고산(大姑山) 노고산은 한강 유역과 금강 유역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서울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서강대학교 뒷산이다. 노고산은 보통 그 지방에서 할미산으로 부르는데, 노고(老姑)의 뜻을 한자로 풀어보면 ‘늙은 할머니’, 즉 할머니라는 뜻이 된다. 할미산의 땅 이름 유래 같은 것을 들어보면 대개 산의 생김새가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 등이 굽은 것과 같은 모습이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단지 땅 이름이 생긴 후에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실제는 ‘한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뫼는 큰 산이라는 우리 말이 변하여 할미산이 된 것인데, 다시 요약하면 한ㅣ>한뫼>한매>할매>할미가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름으로 강남구 남쪽에 헌릉과 인릉을 품고 있는 대모산(大母山)이 있는데 대모산의 옛날 이름이 대고산(大姑山)이다. 황해도 일부지방에서는 할아버지를 ‘큰아버지’, 할머니를 ‘큰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원래 할아버지는 ‘한아버지’, 할머니는 ‘한어미’에서 변화된 말로, ‘한’과 ‘큰’은 동일한 의미이며 또한 아버지의 고모, 즉 할아버지의 여자형제를 우리는 대고모(大姑母)라 부르고, 남의 어머니를 대부인(大夫人)으로 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즉 어원으로 따지면 노고산이나 대고산은 한뫼에서 나온 같은 말이다. 양주군에도 광적면과 장흥면에 노고산이 있고 또 양주읍 유양리에 ‘대모산성’이 있다. 우리말이나 땅 이름에 남아있는 ‘한’은 우리 민족이 북방에서부터 한반도로 오기 전부터 써오던 말로 북방 민족 계열에도 많이 남아있는 말이다. 몽골에서는 부족의 우두머리를 칸(khan, 汗, 干)이라 하고, 징기스칸이나 쿠빌라이 칸의 ‘칸’도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한’과 같은 뜻이다. 만주의 여진족들도 부족의 우두머리를 汗(한)이라 하는데, 특히 병자호란 후 청의 강요에 의해 건립한 송파구 삼전동에 있는 ‘청태종 공덕비’도 일명 ‘汗의 비’라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한’은 그 뜻이 우두머리, 크다, 바르다 등의 뜻이 되고 우리도 부족국가 시대의 씨족이나 국가의 우두머리를 ‘한’이라 불렀다. 그 한이 다스리는 나라의 이름도 ‘한’이라 하였고, 이것을 한자로 옮겨 ‘韓’으로 적어 그 후에는 ‘韓’은 우리 민족을 나타내는 뜻으로 자리를 잡았고, 지금의 大韓이 되었다. 이와 같이 ‘한’은 ‘크다’는 뜻이 되므로 마을의 큰 산을 ‘한뫼’라고 부르고 그것이 변하여 할미산이 된 것이며 이를 다시 한자로 의역(意譯:뜻을 풀어 옮겨적어)한 것이 노고산, 노고봉, 대고산이다.
(3)차령(車嶺) 조선시대부터 서울에서 지방으로 가는 여섯개의 큰 길중에서, 남쪽으로는 문경새재를 넘어 경상도 동래(東來)로 가는 영남대로와 천안에서 차령을 넘어 공주를 지나 삼남으로가는 두개의 길이 있다. 이렇게 문경새재와 차령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고개이름이다. 충청도 예산과 보은땅에도 또다른 차령이 있는데, 이 고개를 순수한 우리말로는 수레재, 수레너머고개라고 하며 이것을 한자로 의역해서 쓴 것이 차령(車嶺)이다. 예전에는 폭이 좁은 고갯길을 인력이나 축력을 이용한 수레가 넘어 다니기는 매우 힘든 상태였기 떄문에 수레와는 직접 관련이 없었을 것이다. 전국에는 수리고개, 수리재, 수리봉, 수리뫼, 수리산 등 ‘수리’라는 땅 이름 가진 곳이 많은데, 수리는 그 말의 어원이 우리 말이 아니기 때문에 사전에도 설명된 것이 없으나 정수리(頂(이마)+수리: 머리 위에 숫구멍이 있는 자리)의 수리를 보면 꼭대기를 뜻하는 말만은 짐작할 수 있다. ‘수리’의 어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필자는 범어 <수리아(SURYA)>에서 나온 말로 이해하고 있는데, 해, 태양이라는 뜻이며 우리말로는 ‘수리’로 쓰여, 수리수리 마하수리(해님해님 위대한 해님), 수릿날(단오), 수리왕(수로왕) 등이며 또한 수리봉, 수리뫼, 수리산, 수리재 등 땅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수리’라는 이름은 남방계열 불교 국가의 땅이나 사람 이름에도 많이 남아있다. 이와 같이 수리는 해의 뜻이고, 해는 또한 거룩하고 성스러운 뜻이기도 하다. 산의 봉우리는 신이 인간 세상과 통하는 영역으로 성스러운 곳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산봉우리를 ‘수리봉’이라 불렀으며, 이 봉우리 이름이 산 이름으로 된 곳이 많았고, 꼭대기에 있는 고개를 수리재로 불렀으며, 이 수리재가 수레재로 전음(轉音)되어 차령이 된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산맥 개념은 일본인들이 지질학적 개념으로 구분한 것으로 산맥 중에서 고개 이름이 산맥 이름으로 그대로 바뀐 것이 차령산맥, 노령(蘆嶺)산맥, 적유령(狄踰嶺)산맥 등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산줄기 개념은 백두산을 종산(宗山)으로 시작해서 곳곳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나누었다고 말한 바 있다. 산줄기 이름 중 백두대간과 장백정간 처럼 산 이름으로 된 것이 두 개이고 나머지 11개는 강 이름에서 따 왔는데, 이것은 산줄기 사이에 물이 흐르고, 이 물이 모이면 강 유역이 생기기 때문에, 산줄기와 강줄기는 나눌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즉 강의 흐름을 따라 언어, 풍습 등 생활 문화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 조상은 한 지점에 떨어진 빗물이 어느 강으로 흐르는가 하는 물줄기와, 그 물줄기를 감싸고 있는 산줄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공주와 예산에 있는 차령은 차령산맥이 아니라 금강과 삽교천 아산만 유역을 구분하는 금북 정맥에 있는 고개 이름들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땅의 중심을 산의 능선을 연결한 산줄기에 두었기 때문에, 대동여지도를 포함한 고지도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표시하였다. 물은 산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줄기는 스스로 물을 가르는 고개가 된다)는 말이 생겼다. 이 말은 우리 전통 지리관의 중심사상이다. 즉 물이 중요하기 때문에 산줄기가 중요하고, 산이 중요하기 때문에 물줄기가 중요한 것이다. 한 예로, 전라북도 장수(長水)에서 남쪽으로 7킬로미터쯤 가면 수분재(水分歭)가 있다. 수분재에 비가 올 때 빗물이 북쪽(장수쪽)으로 떨어지면 장수 읍내를 지나는 금강으로 합류하게 되고, 그 반대로 남쪽으로 떨어지면 남원 시내를 지나는 요천으로 흘러 섬진강에 합류하게 된다. 즉 금강수계와 섬진강 수계로 나누어지는 큰 분수령(分水嶺)이 되는 곳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 고개의 이름도 물이 나누어진다는 뜻의 수분재이니 우리 선조들의 지리관(地理觀)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현재는 물을 가른다는 뜻의 분수령이 중요하고 결정적인 고비란 뜻으로 일반화되어 쓰여지고 있다. 예전에는 지금과 같은 동력을 이용한 운반 수단이 없으므로 고개를 넘어서 무거운 짐을 운반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어, 주로 배를 이용해 강을 따라 평지로 이동하게 된다. 즉 강은 지금의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했다. 따라서 거리가 멀어도 강의 유역을 따라서 자연히 문화권이 형성된다.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서편제와, 동편제는 그 소리의 곱고 애절함과 웅건(雄建), 청담(淸談)함으로 구별되는데 그 차이는 넓은 평야 지대를 품에 안은 영산강 유역과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섬진강 유역의 지리적 차이에 두고 있는 것이다. 곧 한 문화와 다른 문화의 차이는 그 강이 흐르는 물줄기와 그 물줄기를 싸고 있는 산줄기의 모양에서 생기게 되는 것이다.
<참고 문헌> [1]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2] 한국 지명 요람, 건설부 국립 지리원 [3] 지명 유래집, 건설부 국립 지리원 [4] 지도와 지명, 건설부 국립 지리원 [5] 한국 땅이름 큰사전, 한글 학회 [6] 한국 지명 총람, 한글 학회 [7] 국역 신증 동국여지승람, 민족문화 추진회 [8] 도시와 국토, 남태우, 서태열 [9] 한국지리, 권혁재 [10]양주 군지, 양주 문화원 [11]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양주 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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