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테마 |
漢北 왕재지맥 종주산행 (지도:1:25000 정연,외촌,철원,대광,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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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등급 |
초중급 |
▨ 산 행 지 |
야월산(485.9m), 천덕산(476.7m), 군자산(327.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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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재 지 |
경기도 연천 |
▨ 날 짜 |
2011.05.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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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임장소 |
08:40 1호선 창동역 역사내 의정부방향 10-3 탑승장 (시간엄수) |
▨ 연 락 처 |
- 박계수[다올] 019-9007-2790
- HAM:ds1opu (주파수 1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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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코스 |
▲▲ 야월산-2.4km-천덕산-23.1km-군자산-9.8km+3.5km-차탄천(좌) ▲▲ 차탄천(좌)-3.5km+9.8km+군자산-23.1km-천덕산-2.4km-야월산
▶(남측)지맥구간: 야월산-차탄천(좌) // 35.3km ▷접속구간: ?-야월산 // 0.0km
▲산행시간: 약 ?시간 00분(휴식, 식사시간 포함)
(여건에 따라서 계획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
▨ 산행지도 |
☞ 지도를 보실려면 아래 링크를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됩니다. (필요하시면 산행지도 및 일정을 인쇄해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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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지맥 산행지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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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준비물 |
방한방수복,모자,장갑,식수,간식(초코렛,치즈,육포,사탕,빵,떡,과일 등) 헤드랜턴,아이젠,스패츠,점심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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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가 비 |
각자 부담 |
▨ 상세일정 |
(10분만 기다리고 바로 출발합니다.)
- 08:44 창동역에서 소요산행 전철 탑승 출발
- (05:39, 06:10,25,45 07:10,36 08:05,44 09:09,24,54 ...)
- (동두천 05:28,49,57 06:35,54(급),58 07:22,30(급),43 08:24 ...)
- 09:30 소요산역 하차
- 09:50 길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대광리행버스 탑승
- 10:40 도신4리(방아다리) 하차
- 11:00 376번도로 답곡리(금곡리)로 이동
- 11:20 소로 따라 ▲265.7봉 좌측능선 임도고개
- 11:35 능선 갈림길(정상적인 진행방향에서 좌측방향으로)
- 11:40 산행시작
- 12:10 376번도로
- 12:25 ▲224.1봉
- 13:25 점심식사후 출발
- -소로
- 14:25 ▲337.3봉(우측으로 시계방향으로 돌아감)
- -현저(도로)
- 14:55 주라동
- -(우측에 338봉)
- -도로
- -333봉
- 15:50 도로(천덕산 하단)
- xx:xx 천덕산(476.7m)
- xx:xx 야월산(485.9m)
- 지맥산행종료
- 대광리역에서 기차나 버스 타고 귀가
- 전곡 택시:031-832-0322/5511/0838
- 전곡개인택시:031-832-0044
- 연천 택시:031-834-1177
- 연천백학개인:031-835-0033
- 대광리 개인:031-834-7202
위 계획은 희망사항입니다. 어디에서 탈출할지도 모릅니다. |
▨ 산행지소개 |
♣ 왕재지맥은 한북정맥이 북한 장암산에서 가지를 치고, 두리봉, 고성산 갈림길을 지나고, 장고목고개, 왕재봉,발리봉과 남한 야월산,천덕산,군자산을 지나서 차탄천(좌)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99.4(한탄강까지는 +3.5)km에 이르는 산줄기를 말한다.
♣ 야월산(485.9m) 민통선 안
♣ 천덕산(476.7m) 민통선 안, 열쇠전망대
♣ 군자산(君子山: 327.8m) 군자산은 연천읍 서북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이 군남면과 연천읍의 경계를 이루고 멀리 임진강을 굽어보고 있다.
산의 모양은 예부터 웅대한 곰의 형상으로 비유되어 고구려에서는 “공목달현 웅섬산(孔目達縣熊閃山)”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는‘당산(堂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당산을 중심으로 연천의 문화는 발전되어 왔다.
이 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이 산의 꼭대기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깊이를 재보려고 그 우물에 명주꾸리를 계속 풀어 넣었더니, 실끈이 임진강으로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의 정기는 임진강과 이어져 더욱 영험하게 믿어져 왔다.
옛 사람들은 이 산 위의 우물가에 제당을 짓고 매년 길일을 택하여 음식을 장만하고 술을 빚어 하늘에 소망을 기원하거나 은혜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는바, 이 날을 온 고을의 축제일로 삼아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결속을 다졌다.
그 후로 이 같은 제사 의식은 조금씩 간소화되기는 하였으나, 8·15 해방 후까지도 산 위에는 신당(神堂)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봄·가을로 제사가 올려져 액운을 막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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