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현면이란
양주시의 11개 읍면동 가운데 북쪽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동두천시, 남동쪽으로는 회천동, 서쪽으로는 남면 및 광적면, 남쪽으로는 백석읍과 접해 있다. 남쪽에는 도락산(道樂山, 440.8m), 북쪽에는 감악산(紺嶽山, 675m) 자락, 북동쪽에는 소래산(蘇萊山,228.8m)에 둘러싸여 있으며, 신천의 지류인 상패천이 서에서 동으로 휘감아 돌아나가면서 선암리를 중심으로 분지가 발달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경지면적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적지만 토지의 효용가치는 큰 편이다. 행정구역은 면소재지인 선암리를 비롯하여 6개의 법정리와 12개의 행정리로 편성되어 있으며, 선암리에는 면사무소·지서·농협·초등학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은현면을 가로 지르는 56번 국도의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용암리에 양주시에서 최초로 세워진 대학인 서정대학과 국군덕정병원의 신축 이전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많은 발전이 진행되고 있다.
2. 고려 및 조선시대의 은현면
은현면이란 땅이름이 역사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이다. 이곳은 대한제국기까지만 해도 묵은면(默隱面)과 현내면(縣內面)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은현면은 삼국시대부터 별도의 행정구역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한반도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을 근방에 둔 지역으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쟁탈장소였다. 먼저 고구려·백제에서는 이곳을 내을매(內乙買) 혹은 내이미(內省米)라고 불렀다. 내을매현 혹은 내이미라는 땅이름은 이미 삼국사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경덕왕 대에 이르면 사천현(沙川縣)이라는 땅이름을 사용하였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사천(沙川)이란 하천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사천현이란 땅이름 역시 삼국사기에서부터 확인된다. 고려시대에도 사천현은 한강을 끼고 있던 양주나 오늘날의 양주동 일대를 차지했던 현주(見州) 지역과는 별개의 행정구역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 현종 9년(1018) 양주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흔히 사천폐현(沙川廢縣) 혹은 고사천현(古沙川縣)이라 불려졌고, 행정구역상으로는 진답면(陳畓面: 묵은면의 옛이름)과 현내면으로 편성되었다. 진답면은 이것이 후일 묵은면(默隱面)으로 바꿔지는 데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외부에 가려 있고 황무지가 많은 척박한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땅이름으로 보이며, 현내면은 옛 사천현지역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천폐현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 고사천현은 청구도(1834)에서 처음 나타난다.
※은현면의 역사적 변천(일제시대 이전)
▷ 내을매현(內乙買縣) 혹은 내이미(內省米)—고구려와 백제에서 부른 땅이름(삼국
사기). 견성군(堅城郡)의 영현(領縣).
▷ 사천현(沙川縣)—신라 경덕왕 때 내을매현을 고쳐 사천현이라 부름(삼국사기).
▷ 사천현(양주에 편입)—고려 현종 9년(1018) 사천현을 양주에 편입시킴. 고려
사와 세종실록지리지까지 사천현이라는 이름이 등장.
▷ 사천폐현(沙川廢縣)—조선중기 사천현이 폐현이 되면서 사천폐현이라 호칭됨(신
증동국여지승람).
▷ 고사천현(古沙川縣)—옛 사천현 땅이라는 뜻으로 불려짐(청구도 이후).
▷ 진답면(陳畓面), 현내면(縣內面)—1760년 간행된 해동지도 이후 많은 역사지리
서에 등장(여지도서, 호구총서, 동국여도,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
▷ 묵은면(默隱面)—1842년 간행된 경기도읍지 양주목읍지에 처음 나타남(1914년
일제시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묵은면과 현내면을 합쳐 은현면으로 부름).
3. 일제시대의 행정구역 개편과 은현면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지배를 보다 확고히 다지기 위해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묵은면의 일패리(一牌里)·이패리(二牌里)·삼패리(三牌里)·삼패하리 (三牌下里) 전부와 사패리(四牌里) 일부 그리고 현내면의 상패리(上牌里)·중패리(中牌里)·하패리(下牌里) 전부, 이담면(伊淡面)의 유산리(杻山里)·황매동(黃梅洞)·송라리(松蘿里)·안흥리(安興里) 일부, 석적면(石積面)의 항동리(項洞里)·행동리(杏洞里)·대야지리(大也池里) 일부, 적성군 남면의 입암리(笠巖里)·발운리(發雲里)·한산리(閑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은현면을 만들었다. 당시 은현면은 상패리(上牌里)·하패리(下牌里)·용암리(龍岩里)·선암리(仙岩里)·운암리(雲岩里)·봉암리(鳳岩里)·도하리(道下里) 등 총 7개리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정리되었다. 은현면 청사는 용암리(현 용암1리리사무소)에 두었다.
4. 오늘날의 은현면
해방 후에도 일제초기에 개편된 행정구역의 구성은 계속 유지되었다. 1940년 말 정부의 공식기록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49)에 나타나는 은현면 역시 용암리·상패리·하패리·선암리·운암리·봉암리·도하리 등 7개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다가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상패리를 동두천시에 넘겨주어서 현재 6개리가 되었다. 해방이후에도 은현면 청사는 용암리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선암리 현 청사자리로 이전한 후 1984년 12월 24일에 현 청사의 모습으로 증·개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5. 땅이름 유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기존의 묵은면과 현내면의 대부분 지역을 합치면서, 묵은면(默隱面)의 ‘은(隱)’자와 현내면(縣內面)의 ‘현(縣)’자를 합쳐 은현면이라고 하였다.
(1) 용암리(龍岩里)
용암리는 은현면 안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동쪽으로 회천1동의 봉양동·덕정동, 서쪽으로 은현면 선암리·도하리, 남쪽으로 회천2동의 덕계동, 북쪽으로 은현면 하패리와 접해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묵은면 일패리와 일패하리를 병합하여 만들어진 용암리는 원래 묵은 논이 많아 묵은논이·진답(陳畓)·묵은동(默隱洞)이라 불리웠으며, 옛 묵은(진답)면사무소가 있었던 관계로 일패라고도 하였다. 옛 묵은(진답)면사무소는 현재 용암1리 리사무소로 변하여 3층의 신축건물이 들어서 용암리 주민들의 여가활용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용암리라는 땅이름이 유래된 것은 악대산(일명 약대산)에 전체둘레 15m, 폭 6m, 높이 3m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한 용바위가 있어 용바위·용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용암리에는 양주시에서 최초로 세워지는 대학인 서강정보대학이 들어서 양주지역 교육의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하게 될 것이며, 아울러 국군덕정병원의 신축이전 공사가 진행 중에 있어 앞으로 보다 많은 변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감탕골
정자동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의 땅이름이 왜 감탕골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 어느 양반의 집, 즉 당(堂)이 있어 대감집이 있는 고을이라는 뜻의 감당(監堂)고을이 된소리로 발음되면서, 감당(監堂)고을〉감탕고을〉감탕골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79-1번지 일대이다.
■구석말
용암리쪽으로 쭉 뻗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구석진 곳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이 마을은 악대산(일명 약대산)과 반대쪽 도락산 산줄기가 만들어 놓은 깊은 골짜기의 맨끝 쪽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양주시에는 용암리의 구석말 이외에도 회천2동의 덕계동과 양주1동의 산북동에 동일한 땅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계곡 또는 협곡의 맨 끝쪽 구석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36-2번지 일대이다.
■기와집말
한씨 종가집터이며 남양부부인 홍씨 종중 재실이 있다. 옛날 한씨종가의 집이 기와집이었던 관계로, 이곳 마을에 유일하게 기와집이 있다는 뜻에서 ‘기와집이 있는 마을’이라 불리우던 것 이변하여 기와집 마을〉기와집 말로 불리게 되었다. 남양부부인 홍씨는 조선 초기 재상인 양절공 한확의 부인이며, 인수대비 한씨의 어머니이고,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의 외할머니가 되는 분이다. 향년 47세로 사망한 그 녀의 무덤은 현재 기와집 말의 양지바른 언덕에 묻혀 있는데, 무덤 밑에는 여성으로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한 신도비(연산군3년[1497] 임사홍이 비문을 지었다)가 서있다. 그녀의 무덤 밑에는 구전설화로 내려오고 있는 코끼리의 무덤이 있는데, 바로 남양부부인 홍씨의 신도비로 쓰일 돌을 중국에서 싣고 왔다가 이 땅에서 숨을 거둔 코끼리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양주시에서는 남면 상수리에도 같은 땅이름이 보이는데, 이 또한 남양 홍씨 종가집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이와 같은 땅이름이 쓰였다. 823-6번지 일대이다.
■동이점
기와집 말에 있는 남양부부인 홍씨 묘소. 사진 하단부의 둔덕 같은 곳이 코끼리 무덤으로 전해오는 곳이다. 묵은동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동이를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두 집이 있다. 이곳은 도락산 자락 계곡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숨어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마을로 추정된다. 특히 조선 후기 대원군 집정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여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생계수단으로 독이나 동이를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동이를 구워 팔아서 생계유지를 하던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에서 ‘동이점[동이店]’이라는 땅이름이 붙여졌다. 일설에는 일제시대 이곳 돌악산 자락에 중석광산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광산채굴에 종사하러 이곳에 온 광부들이 음식과 술을 먹던 주막집이 있었고, 그 주막집에서 술동이에 담근 술을 팔았기 때문에 술동이 술을 팔던 주점을 줄여서 동이점이라하였다고 한다. 여러 증언에 의하면 이곳 용암리 동이점 마을 뒷산의 주석광산에서 광산채굴을 하는 과정에서 광구세를 받았다고 한다. 양주시에서는 은현면 봉암리에도 동일한 땅이름이 보인다. 906번지 일대이다.
■득세이·득성마을[得聖-]
400여 년 전부터 여산(礪山) 송씨(宋氏)의 집성촌(集姓村)이었던 마을이다. 송씨 가문에서 문장성인(文章聖人:문장이 뛰어난 훌륭한 인재)이 연이어 나오게 되어 ‘성인을 얻었다’라는 뜻의 득성(得聖)마을이라는 땅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실제 송인(宋寅)·송질(宋呈) 등 조선시대 명문장가가 연이어 나오면서 여산 송씨는 명문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일설에는 성인이 계속 나오게 해달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득세이는 득성마을을 발음하는 과정에서 득성이〉득세이로 변한 것이다. 659번지 일대이다.
■묵은동(默隱洞)
현재 용바위식당이 있는 동네를 중심으로 옛 용암리를 부르던 땅이름이었다. 용바위식당 뒤쪽 마을입구에 민무질묘가 있는데, 민무질은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의 처남이자 세종대왕의 외숙부로 그의 묘를 이곳에 모시고 부근 일대의 논을 사패지로 정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해 이곳 일대의 땅에 농사를 짓지 못하여 모든 땅이 묵은 논이 되었으므로 ‘묵은배미’ ·’묵은논’이라 불리던 것이, 이것을 한자어로 옮기면서 묵은동(默隱洞)이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는 조선 태종 때 민무질·민무구 형제를 매부인 태종이 역적으로 몰았으므로 이곳에 쫓겨 와서 묵묵히 은신하였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하나 잘못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묵은배미(묵은논)는 조선시대 지리도서에 의하면 한자 ‘진답(陳畓)’으로 나타나고 있어 일찍부터 묵은배미(진답)라는 땅이름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묵은동은 내묵은(內默隱)·외묵은(外默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묵은은 지금의 정자동·감탕골·묵은동을, 외묵은은 신내(원터)·득성마을·신촌마을을 가리킨다. 일제시대 은현면사무소는 원래 묵은동(현 용암1리 리사무소 자리)에 있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선암리 현 은현면사무소 자리로 옮겨졌다.
■바깥묵은논이·외묵은
묵은동(묵은논이) 바깥큰냇가, 즉 신천(莘川) 옆에 있는 마을이다. 다른 말로는 신내 혹은 원터라고도 부른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회암사의 스님 1천여 명이 이곳에 들어선 시장인 승내장(僧來場:회암사의 스님들이 오는 시장이라는 뜻)에 와서 온갖 물품을 사고팔았다고 한다. 조선후기로 들어오면서 이곳이 북쪽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교통의 요지가 되자 바깥묵은 논이를 중심으로 신천장(莘川場[경기도읍지 양주목], 또는 新川場[여도비지], 신천장이 있었던 자리는 253번지 일대이다)이 들어서면서 장시가 발달하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주막과 여각 즉 원(院) 등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 지나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들어와 경원선 철로가 부설되면서 교통의 중심이 현재의 덕정역 부근으로 변하면서 바깥묵은논이에 들어서 있던 신천장도 덕정역부근으로 이전되어 신내장(신천장)의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덕정역 인근에 들어선 덕정장이 옛 신천장(신내장)의 명성을 이어가게 되었다. 현재 이곳의 다른 이름으로 신내·원터라는 땅이름이 남아 있어 옛신천장(신내장)의 흔적을 알 수 있을 뿐이다. 516번지 일대이다.
■바깥신내·외신천·외천
신내, 즉 신천(莘川) 바깥에 있었던 마을이다. 한자어로는 외신천(外莘川)이다. 신천장(신내장)의 형성과 더불어 급격하게 인근 지역이 발달하면서 함께 들어선 마을이다. 옛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모두 농지로 변하였으며, 그나마도 3번 국도인 평화로의 확장과 더불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517번지 일대이다.
■상하터
득성마을 북쪽, 소라산 남쪽에 있는 마을 및 골짜기를 가리킨다. 현재 파평이 본관인 윤효정의 재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대부분 공장지대로 바뀌었다. 이 마을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어 그 나무만큼 역사가 오래되고 그윽한 향취가 온 동네에 스며들어 있지만, 상하터라는 마을이름의 유래를 아는 사람은 없다. 131번지일대이다.
■샘골
묵은동 전체에서 정자동과 웃말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 청송 심씨 집안사람이 이곳에 들어와 터를 닦았다고 전해오는데, 예로부터 이곳에서 샘이 난다하여 샘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따라서 청송 심씨는 샘골 심씨라고도 불리워졌다. 현재는 마을이 모두 없어지고 육군 덕정병원의 신축공사가 한창이어서 샘골이라는 이곳의 땅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461번지 일대이다.
■세집매
소래동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제시대 소래보를 개척한 청송 심씨 집안 세 사람의 집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시대부터 이곳에 세 집이 있어 세집매로 불였으며 지금까지 그대로 마을이름으로 전해내려 오고 있다. 80년 이상 된 소래보의 원래 주인은 심의 교씨였으며 소래벌 옥리구역의 수세를 징수하여 소래보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현재 소래보는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 남아 있으며, 소래보의 물을 대서 안정적인 농사를 지었던 소래들 또한 현재도 소래보에가두어진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그리고 소래보를 통해 전해지는 물의 수량을 조절하기 위해 소래들 쪽에 만들어진 수문(水門)도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세집매에는 청송 심씨 사람들은 없고 김국규씨가 살고 있다. 146번지 일대이다.
■소래마을·소래동(蘇萊洞)
신내 북동쪽 소래산 밑에 있는 마을로 소래마을이라고도 한다. 소래산(蘇萊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므로 소래동이라는 땅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소래동이라는 땅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첫째, 소래산에 있는 소나무에 담쟁이 덩쿨이 많이 있어 송라(松蘿)로 불리다가 소래로 변하였다고 한다. 둘째, 조선시대 어느 해에 큰 흉년이 들어 쌀이 모자라자 이 마을사람들이 소래산 기슭에서 나는 쑥과 소나무껍질에 붙은 송라(松蘿:소나무 겨우살이. 산의 소나무가지 등에 붙어사는 지의류로 한방에서 이뇨·거담제로 쓰며, 특히 결핵에 대한 항균성이 있다)로 연명하게 되었는데, 이 송라가 변하여 소래가 되었다고 한다. 셋째, 소래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이 마치 여승(女僧)들이 쓰는 모자인 송낙(소나무 겨우살이, 즉 송라로 만든 모자로 송라립[松蘿笠]이라고도 한다)과 같다 하여 송낙이라고 불리다가 송라〉소라〉소래로 변하였다고 한다. 현재 소래마을은 신천을 사이에 두고 3번국도인 평화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예전의 농경지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공장과 음식점 등이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80번지 일대이다.
■신내
묵은동(묵은논이) 바깥 큰 냇가, 즉 신천 옆에 있는 마을이다. 신천은 신천(莘川)·신천(新川)·신천(信川) 등으로 불리며 이 마을의 젖줄로써의 역할을 하였는데, 이러한 하천 주변에 발달한 신내마을은 다른 말로는 바깥묵은논이 혹은 원터, 또는 승래장터·장거리·승래(僧來)라고도 하였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회암사의 스님 1천여 명이 이곳에 들어선 시장인 승내장(僧來場: 회암사의 스님들이 오는 시장이라는 뜻)에 와서 온갖 물품을 사고팔았다고 하여 ‘승래’라는 땅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나, 승래는 신내가 잘못 발음되어 와전된 후 전설적인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로 들어오면서 이곳이 북쪽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교통의 요지가 되자, 바깥묵은논이를 중심으로 신천장(莘川場[경기도읍지 양주목], 또는 新川場[여도비지])이 들어서면서 장시가 발달하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주막과 여각[院] 등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 지나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들어와 경원선 철로가 부설되면서 교통의 중심이 현재의 덕정역 부근으로 변하면서 바깥묵은논이에 들어서 있던 신천장도 덕정역부근으로 이전되어 신내장(신천장)의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덕정역 인근에 들어선 덕정장이 옛 신천장(신내장)의 명성을 이어가게 되었다. 현재 이곳의 이름으로 신내·원터라는 땅이름이 남아 있어 옛 신천장(신내장)의 흔적을 알 수 있을 뿐이다. 516번지 일대이다.
■신촌동·신내동
원대마을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신천장(신내장)이 들어서면서 새롭게 큰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뜻의 신촌(新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 땅이름 중 신촌이라는 이름은 거의 대부분이 원래 사람들이 살지않던 지역이었으나 조선후기 장시의 발달과 더불어 새롭게 형성되거나,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외국군대가 주둔하면서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부대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곳 신촌동도 신내장(신천장)의 발달과 더불어 새롭게 형성되면서 신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내장이 덕정장으로 옮겨가면서 신촌의 번화함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512번지 일대이다.
■아랫소래
소래동 전체에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소래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형성된 소래마을은 그 동쪽에 신천 이북에서 남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신천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그 상류지역인 남쪽은 웃소래, 북쪽은 아랫소래로 나뉜다. 하패리와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하패리에도 아랫소래라는 땅이름이 나타난다. 92-12번지일대이다.
■아홉배미
신내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논 아홉 배미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굿배미의 여자가 시집와서 살던 집을 굿배미네라고 부르다가 굿이 구(아홉)로 바뀌어 구배미〉아홉배미가 되었다고 하나 이는 와전인 듯하다. 511번지일대이다.
■안묵은논이·내묵은
바깥묵은논이와 대칭되는 묵은동(묵은논이)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안묵은논이로 불리고 있다. 감탕골·정자동·묵은동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으로 주로 민무질묘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한자로는 내묵은(內默隱)이라고도 한다. 697번지일대이다.
■외촌(外村)
해방 이후 신촌동 외부, 악대산 동쪽에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다. 원래는 신촌에 속하였다가 따로 떨어져 나가 해방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313번지 일대이다.
■웃말
묵은동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묵은넘이라고도 한다. 묵은동에서 가장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웃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땅이름은 대개 그 모양새와 위치에 따라 불리게 되는데, 웃말·아랫말이라는 명칭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한자로는 상동(上洞)이라고도 쓰이는 웃말이라는 땅이름은 양주시에도 매우 많아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산북동, 양주2동의 광사동·고읍동, 백석읍 복지리·연곡리, 은현면 운암리, 남면 신산리·구암리에도 보이고 있다. 372번지 일대이다.
■웃소래
소래동 전체에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소래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형성된 소래마을은 그 동쪽에 신천 이북에서 남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신천의 흐르는 방향에 따라 그 상류지역인 남쪽은 웃소래, 북쪽은 아랫소래로 나뉜다. 옛 일패상리가 바로 웃소래이다. 620번지 일대이다.
■원대마을[院垈-]·원터골
소래동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원(院)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제14대 임금인 선조께서 1583년(선조16) 중종의 셋째 딸이자 자신의 고모인 정순옹주(貞順翁主, 여성위 송인의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잠시 거처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설에는 역원(驛院)터가 있었기 때문에 원터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원터를 한자로 쓰면서 원대(院垈)라 하였고, 이후 원대마을 혹은 원터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대마을에는 악대산(약대산)이 있으며, 그 악대산 북쪽 자락에 미륵불과 탑으로 쓰인 석재들이 남아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원터라는 이름은 은현면 봉암리에도 있지만 그곳은 남을진의 사당인 정절사, 즉 사천서원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에서 원터라고 불리었다. 675번지 일대이다.
■정자동
묵은동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2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 그 은행나무 옆에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정자동이라는 마을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장흥면 삼상리에도같은 땅이름이 있는데, 이곳과 마찬가지로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정자동이라는 마을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697번지 일대이다.
○개댓벌
신촌마을 북동 쪽에 있는 논과 밭이다. 원래는 소래동 중심을 지나 신천으로 흘러들어 가는 지류인 상패천 옆의 모래밭이었으나, 1930년대 이 마을사람인 이한우가 개간하여 옥토가 되었다고 한다. 개댓벌이란 개천의 큰 벌판이란 뜻으로 하천지류인 개천 하류지역에 넓게 발달된 모래벌판을 말한다. 원래 모래벌판이었던 개댓벌을 옥토로 개간한 이한우씨는 상패천의 범람을 차단하기 위해 한우동둑을 쌓아 자연재해에 대비함으로써 모래벌판에 불과하던 이곳을 경작지로 탈바꿈시켰다. 217번지일대이다.
○개머리고개
외촌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두엄산과 악대산사 이에 있는 고개로 두엄산이 마치 개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02-6번지에 있다.
○국담고개
득성마을에서 선암리에 있는 국담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용암리 득성마을과 선암리 국담마을은 상패천을 휘어감고 도는 산자락을 경계로 갈려있는데, 득성마을과 국담마을을 중심으로 여산 송씨 집성촌이 형성되면서 송질과 송인 등 유명한 문인들이 그 아름다운 산자락과 상패천의 풍경을 함께 간직하면서 넘나들었던 고개이다. 현재도 이 고개는 그 옛날 세월의 흔적을 가득 안은 채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산19번지에 있다.
○긴골산
소래산 남쪽 큰골에 있는 산이다. 이 산의 골짜기 골이 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씨 종중 족보에는 송라산의 일부로 표기되어 있다. 산20번지 일대이다.
○너마지기논
신촌동 북서쪽에 있는 논이다. 현재 이홍전의 논이다. 양주지역에서는 논 한마지기가 200평이므로 네마지기는 800평이 된다. 523번지 일대의 논이다.
○능너머
회천2동의 회정동 과골에 있는 비암산(鼻巖山)을 넘어 은현면에 위치한 첫번째 골짜기이다. 현재 도락산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능너머라는 땅이름이 붙여지게 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밀양 박씨 박이서(朴彛廻)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신하들이 꺼리는 뱃길을 통해 중국에 진위사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해풍(海風)으로 인해 배가 뒤집혀 익사하자, 임금이 이를 가슴 아파하고 경기도 관찰사에게 전교하여 예의를 갖춰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이후 이곳사람들이 박이서의 묘를 능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너머 편인 묵은동 쪽을 가리키는 땅이름을 능너머라고 부르게 되었다. 산56-1번지 일대이다.
○달걀바위
도락산 산줄기에 있는 무당너머 서쪽 도락산 자락에 있는 높이 4.2m, 둘레 11.3m의 바위이다. 마치 달걀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락산 자연발생 유원지 맨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이 바위는 서북향을 하고 산자락에 서있으며 앞에는 무덤이 있다. 산83-7번지에 있다.
○도장굴
동이점으로 넘어가는 도락산에 있는 골짜기로 동이점 동쪽에 있다. 도장굴의 ‘굴’은
‘골’의 사투리로 골짜기를 뜻하는 말이며, 산세가 험한 지역에 있는 골짜기이므로 예전에 이곳에서 도살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장굴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872번지 일대이다.
○돔대산·됨산·두엄산
소래동 남쪽에 있는 산이다. 마치 풀·짚 등을 쌓아 만든 퇴비인 두엄을 쌓아놓은 것 같다하여 두엄산이라고도 한다. 두엄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개머리같이 생겨 이곳에 있는 고개이름 또한 개머리고개이다. 산28번지 일대이다.
○동개울
도락산에서 발원하여 원터 동쪽을 흘러 신천에 합류되는 개울이다. 원터 동쪽을 흐르는 개울이므로 동개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은현면 선암리에도 같은 땅이름이 보인다. 545-3번지 일대이다.
○뒷골
도락산 자락에 있는 달걀바위. 마치 달걀처럼 생겼다. 동이점에 올라가는 길에 있는 골짜기이다. 묵은동에서 보면 뒤에 있는 골짜기이므로 뒷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양주시에는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3동의 고암동, 회천4동의 율정동, 양주1동의 어둔동·산북동, 백석읍 가업리·기산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 등에 같은 땅이름이 보인다. 모두한마을의 뒤쪽에 있다하여 뒷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856번지 일대이다.
○득성고개
원대마을과 득성마을 사이의 고개이다. 원대마을 쪽 사람들은 이 고개를 득성마을로 넘어간다 하여 득성고개라 하고, 득성마을 사람들은 원대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원터고개라 한다. 원터고개라는 땅이름은 은현면 봉암리에도 나타난다. 산20번지에 있다.
○무당너미
도락산 산줄기에 있는 골짜기로 무당이 굿을 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양주시에는 남면 한산리에도 같은 땅이름이 있는데, 이곳에도 예전에 유명한 무당이 있어 그 무당집으로 넘어가는 곳이라 하여 무당너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산83-7번지 일대이다.
○묵은재고개
묵은동 동쪽에서 회천2동의 회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묵은재라고도 한다. 실제 이곳을 넘어가면 현재의 덕정사거리로 내려가게 된다. 예전에는 이 고개를 넘나들던 트럭에서 떨어지는 각종 도구나 보따리만 주어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올 정도로 무척 험한 고갯길이었지만 지금은 도로폭도 넓혀지고 높이도 낮아졌다. 은현에서 회천을 거쳐 의정부로 나가는 통로구실을 하는 고개이다. 산51-8번지 일대이다.
○문앞논
신촌동 북쪽에 있는 민씨 종중의 논이다. 옛날 민씨 종중 가옥문 앞에 바로 붙어있는 논이었기 때문에 문앞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백석면 기산리에도 같은 이름이 나오는데, 이곳과 마찬가지로 문 앞에 위치하고 있는 논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513번지와 514번지의 논이다.
○물동이바위
원터마을에서 소래보 쪽으로 가다가 상패천을 끼고 있는 산자락에 북쪽을 향해 서있는 바위이다. 마치 아낙이 물동이를 이고가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신기하게도 세로로 길쭉한 바위 위에 물동이같이 생긴 바위가 얹혀져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밑은 상패천이 굽이쳐 흐르고 산자락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움에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산20번지에 있다.
○미륵불
원터마을 악대산 북쪽 자락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미륵부처이다. 예전에 조그만 암자(절)가 있었다고 전해오는 이곳에는 현재 높이 1m의 돌 미륵불이 있는데, 머리부분은 잘려진 상태로 남아있어 지난 역사의 흔적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돌미륵불 근처에는 불좌대와 석탑부재들이 널려있어 이곳이 암자터였음이 확실하지만, 절의 이름과 내력을 아는 사람들이 없어 언제 만들어져서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산26-7번지에 있다.
○미말
두엄산 서북쪽 끝자락에 있는 밭으로 민씨 종중이 위치하고 있는 묵은동에서 볼 때 신천과 경계가 되는 끝부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말은 미마을의 준말로 한자로는 미말[尾-]이 된다. 218번지이다. 악대산 북쪽자락에 있는 미륵불. 머리가 잘린 채 간이로 만든 건조물로 보호하고 있다. 일설에는 약사불이라고도 한다.
○방수터·박수터
소래동 남동쪽에 있는 방수시설 터이다. 소래보로부터 나오는 물이 장마 때 넘치지 않도록 신천으로 빠지게 하기 위해 만든 구멍으로, 물개폐기 역할을 하였다. 소래보를 만든 심의교씨가 만들었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189-3(구)번지에 있다.
○범답논
소래동에 있는 논이다. 이 논에 범이 빠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논이다. 아마도 ‘호랑이 담배 피는 시절부터 있었던 논’이라는 뜻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589-3번지이다.
○비냥
원터마을에서 득성마을로 넘어가는 득성고개에 있는 기암절벽이다. 비냥은 벼랑, 혹은 비탈의 사투리로 바로 병풍바위와 물동이바위를 끼고 있는 벼랑을 이르는 말이다. 그 옛날 이곳을 찾은 무수한 시인묵객들은 이곳의 경치에 반하여 수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지역사람들의 안식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산20번지에 있다.
○서울고개
묵은재고개, 즉 지금의 덕정사거리로 나가는 고갯길의 남쪽에 있었던 고갯길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회천2동의 회정동내 탑동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현재는 사용하지 않아 사람들이 다닐 정도의 좁은 길만 남아있다. 예전에 묵은동 사람들은 이곳 서울고개를 넘어 회정리 탑동을 거쳐 회정리 벌말, 회천4동의 옥정동 독바위 앞을 지나 율정리를 거쳐 현 양주2동의 고주내를 통해 서울로 다녔다고 한다. 서울로 갈 때 가장 빠른 지름길로 사용된 고개였기 때문에 서울고개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양주시에서는 양주2동의 광사동에도 같은 땅이름이 보인다. 산52-8번지 일대이다.
○소래개울·신내개울
소래마을 남쪽 앞을 흐르는 개울이다. 신내개울이라고도 불리운다. 현재 이 하천의이름은 상패천으로 불리고 있다. 240-1번지 일대이다.
○소래다리·사귀다리
소래마을 동쪽에 있는 다리이다. 소래마을에서 신천을 건너3번 국도 평화로를 지나 회천1동의 봉양동 사귀마을과 통행하던 다리로 소래마을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나무로 만든 다리였으나 돌다리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콘크리트로 만든 현대식 다리로 변하였다. 용암리의 모든 번지를 매기는 기점이기도 하다. 2-3번지에 있다.
○소래산(蘇萊山)·소라산(蘇羅山혹은 所羅山)·송라산(松蘿山)
용암리 동쪽 평화로 국도변에서 보이는 높이 228.8m의 산으로 용암리·하패리·선암리에 걸쳐있다. 소래산은 16세기 동국여지승람에 그 이름이 나오기 시작하여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각종 지도와 경기도읍지 등에 소라산(所羅山)·소라산(蘇羅山)·소래산(蘇萊山)·송라산(松蘿山) 등의 명칭으로 쓰여 왔다. 소래산이라는 이름이 붙게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첫째, 예전에 이 산에 소나무가 많았는데, 그 소나무에 담쟁이 덩쿨이 많이 붙어 있어 이것을 송라(松蘿)로 부르다가 소래로 변하였다고 한다. 둘째, 조선시대 어느 해에 큰 흉년이 들어 쌀이 모자라자 이 마을사람들이 이 산기슭에서 나는 쑥과 소나무껍질에 붙은 송라(松蘿: 소나무 겨우살이. 산의 소나무 가지 등에 붙어사는 지의류로 한방에서 이뇨·거담제로 쓰며, 특히 결핵에 대한 항균성이 있다)로 연명하게 되었는데, 이 송라가 변하여 소래가 되었다고 한다. 셋째, 이 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이 마치 여승(女僧)들이 쓰는 모자인 송낙(소나무 겨우살이, 즉 송라로 만든 모자로 송라립[松蘿笠]이라고도 한다)과 같다 하여 송낙이라고 불리다가 송라〉소라〉소래로 변하였다고 한다. 현재 소래산은 신천을 사이에 두고 3번국도인 평화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양주와 동두천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바라볼 수 있다. 소래산 정상은 용암리 산14-1번지, 하패리 산136-1번지, 선암리 산2번지 경계부분이다.
○소막골논
원터마을 남쪽 긴골 산안에 위치한 두마지기 정도, 즉 400여 평의 작은 논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원터마을에 세거(世居)하고 있는 이씨 종중에서는 송라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긴골산의 깊숙한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깊은 골짜기 안에 막혀서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는 논이라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681번지이다.
○스므나무거리
소래다리 남쪽 신천변에 있는 들판이다. 예전에 신나무(단풍나무과에 딸린 갈잎 작은 큰 키나무. 높이 3m 쯤으로 6∼7월에 엷은 녹색 또는 불그레한 녹색의 잔꽃이 피고, 가을에 단풍이 들어 아름답다. 개울가나 축축한 곳에 자란다)가 스무그루 정도 심어져 있어 이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이후 잠시 미군비행장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9-6번지 일대이다.
○시루떡밭골
묵은동 남쪽 도락산 정상 밑에 있는 골짜기이다. 정상 밑쪽에 개간한 밭이 하나 있는데, 이 밭을 떡한시루에 샀다고 하여 시루떡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산57번지에 있다.
○신내다리
신내개울에 있는 다리이다. 신내개울, 즉 현재의 상패천과 신천이 합쳐지는 지점에위치한 다리로 이 다리를 기점으로 회천1동의 덕정동·봉양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현재 이 다리는 3번국도인 평화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자동차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260-1번지에 있다. 회천1동의 덕정동 495-11번지와 봉양동 941-1번지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다.
○신내저수지
구석말 남쪽에 있는 저수지이다. 일제시대 말기 민의식 면장을 중심으로 용암리 사람들이 등짐으로 흙을 날라 둑을 쌓아 만든 저수지이다. 지금은 용암낚시터가 들어서 있다. 면적은 9ha, 저수량은 6,000t이다. 346-2번지이다.
○악대산(岳大山)·약대산(藥大山)
득성마을과 원터마을 남동쪽에 있는 산이다. 용암리라는 땅이름이 유래된 것이 바로 악대산(일명 약대산)에 있는 용바위(전체둘레 15m, 폭 6m, 높이 3m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때문에 붙여졌다. 악대산이라는 이름은 정상에 있는 용바위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신천 쪽에서 회정리 쪽으로 가는 길에 우뚝 솟아있는 이 산 정상에 위치한 용바위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큰 바위로 보였기 때문에 ‘큰바위가 있는 산’이라는 뜻에서 악대산(岳大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약대산(藥大山)은 악대산을 발음하는 과정에서 와전된 것으로 여겨지나, 일설에는 현 악대산 북쪽자락 미륵부처가 있는 곳에 옛날에 사찰이 있었는데, 이 절에 모셔진 부처님이 약사불(藥師佛)이었기 때문에 ‘약사불이 있는 큰 산’이라는 뜻에서 약대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산28-2번지 일대이다.
○용바위
악대산 정상부근에 있는 바위이다. 전해내려 오는 전설에 의하면 용이 하늘로 올라가려다 그 위에 떨어진 큰 바위에 깔려 죽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실제 바위의 모습이 용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용암리라는 땅이름은 바로 악대산(일명 약대산)에 있는 용바위에서 유래하였다. 전체둘레 15m, 폭 6m, 높이 3m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한 용바위는 예전 신천장을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장소에 있으면서 그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데, 현재는 악대산 정상에 나무들이 무성하여 외부에서는 용바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양주시에는 남면 구암리와 한산리, 장흥면 석현리에도 같은 땅이름이 보인다. 특히 용은 날이 가물 때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금을 상징하는 상상 속의 동물이었기 때문에 신천장을 오고가던 많은 사람들의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면서 현재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산28-2번지·산48번지·산49번지의 경계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원터고개 → 득성고개
○진골·긴골
긴골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긴골 혹은 진골이라 한다. 진골은 긴골의 사투리이다. 골짜기가 길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서는 백석읍 방성리, 은현면 도하리에서진골과 같은 이름이 나타나며, 회천1동의 봉양동, 백석읍 복지리·가업리·연곡리, 은현면 도하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부곡리에서는 긴골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산20번지에 있다.
○진골산
원대마을 서쪽, 소래산 남쪽 큰골에 있는 산이다. 이 산의 골짜기 골이 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골산은 긴골산의 사투리이다. 이씨 종중 족보에는 송라산의 일부로 표기되어 있다. 산20번지 일대이다.
○진터벌
소래마을 남서쪽에 있는 벌판이다. 옛날 이곳에서 개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진을 치고 싸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정확한 역사적 유래는 알 수 없다. 일설에는 두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물이 범람하는 곳에 위치하여 땅이 질다는 뜻에서 진터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665번지일대이다.
○찬우물
악대산의 북쪽자락에 있었던 우물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무척 찬우물 물이 나왔다고 전하나 현재는 없어졌다. 양주시에서 회천1동의 봉양동, 양주1동의 산북동, 은현면 선암리에 같은 이름이 보인다. 산26-1번지 북쪽 끝에 있었다.
○참나무모퉁이
원터마을에서 외촌으로 나가는 두엄산 동쪽 끝자락에 있다. 예전에 이 산자락에 참나무가 많았는데, 원터에서 이곳을 돌아 외촌으로 나갔으므로 이와같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산31번지에 있다.
○코끼리무덤
기와집말 남양부부인 홍씨묘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만 무덤이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남양부부인 홍씨의 신도비로 쓸 돌을 중국에서 싣고 왔다가 이 땅에서숨을 거둔 코끼리를 여기에 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양부부인 홍씨는 조선초기 재상인 양절공 한확의 부인이며, 인수대비 한씨의 어머니이고,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의 외할머니가 되는 분이다. 현재 기와집말의 양지바른 언덕에 그 녀의 무덤과 함께, 여성으로서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는 신도비(연산군 때 임사홍이 비문을 지었다)가 서있고, 그 녀의 무덤 바로 밑에 구전설화로 내려오고 있는 코끼리의 무덤이 있다. 산54-1번지에 있다.
○큰골
소래산 서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커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서는 양주1동의 어둔동, 양주2동의 삼숭동, 백석읍 복지리·가업리, 은현면 도하리, 남면 경신리, 광적면 가납리·우고리, 장흥면 석현리에 동일한 이름이 보인다. 산17번지에 있다.
○큰골산
소래산의 서남쪽의 산자락으로 큰 골짜기를 끼고 있어 큰골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산7번지 일대를 가리킨다.
○한우동둑
신내마을과 소래마을의 경계부분인 상패천의 북쪽 자락에 있는 둑이다. 소래동 중심을 지나 신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인 상패천 옆의 모래밭을, 1930년대 이 마을주민인 이한우·서병설이 개간하여 옥토로 만든 후, 상패천의 범람을 차단하기 위해 이 둑을 쌓았다고 한다. 그 결과 모래벌판에 불과하던 곳(개댓벌)이 수리안전답으로 변화하였다고 한다. 한우동둑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한우가 만들어 놓은 둑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215-1번지 일대이다.
(2) 선암리(仙岩里)
선암리(仙岩里)는 은현면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 용암리, 서쪽으로 운암리, 남쪽으로 도하리, 북쪽으로 하패리와 접해있다. 선암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이다. 이곳은 대한제국기까지만 해도 묵은면(默隱面) 이패리(二牌里)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묵은면 이패리의 일부인 뒷들·나리골·능골·새말·산골을 떼내어 선암리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나와 있다.
선암리란 땅이름은 이 지역에선 돌·선돌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입석동(立石洞)으로 불리기도 한다. 288-8번지 상패천가에 위치한 선돌은 신선바위·선녀바위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상패천의 수량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기 때문에 선돌은 옛날보다 많이 노출되어 있다. 현재 선암리에는 은현면사무소·지서·농협·초등학교 등이 자리 잡고 있어 은현면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 역사적 인물인 송질과 송인의 묘가 있기 때문에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마을로 기억되고 있다.
■굿배미·구뺌이·국담말 [菊潭-]
선암리 안에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상패천이 휘감아 돌아가는 지역에 위치한 관계로 선돌 주변에 깊은 연못이 발달했는데, 이곳에 국화가 만발했다 하여 국담(菊潭)이라고 불리워졌다. 따라서 원래는 국담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국담말[菊潭-]’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경작을 하여 논이 형성되자 이 마을을 부르는 명칭이 국논〉굿논〉굿배미〉구뺌이로 변하였다고한다. 배미는 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흔히 논배미라고 부르는 것이다. 양주시에는남면 구암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뜻은 조금 다르다. 구암(龜岩) 즉 거북바위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구배미[龜--]〉굿배미라고 불리고 있다. 272-9번지 일대이다.
■나리골·나리꿀·비동(飛洞)
뒤들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기슭에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이 마을은 양쪽에 나지막한 산자락이 펼쳐져 있어 마치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펼친 듯한 모습으로 감싸 안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자로는 비동(飛洞)이라 한다. 이밖에도 능골에서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내리보이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내리골〉나리골이 되었다고 하는 설과, 옛날에 이 마을이 벼슬한 나리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 하여 나리골이라 이름이 붙어지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모두 와전인 듯하다. 36-7번지 일대이다.
■능골·능동(陵洞)
은현면사무소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영의정을 지낸 숙정공 송질(宋呈)의 묘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대개능골이라는 이름은 능선골짜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는데, 이곳은 조선중기 명재상이었던 송질의 묘가 마치 왕릉처럼 자리 잡고 있기에 능골로 불리게 되었다. 송질(1454∼152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으로 책봉된 후 영의정까지 올랐던 분으로 그의 묘앞에는 신도비가 놓여있다. 한자로는 능동(陵洞)이다. 양주시에는 남면 구암리·황방리, 광적면 비암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능선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449번지 일대이다.
■뒷들·뒤뜰·후평(後坪)
나리골 동쪽에 있는 들판 혹은 그 들판에 있는 마을이다. 나리골 뒤에 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 은현면사무소가 있는 지역주변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으므로 이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되었다. 나리골과 능골 주변에 터를 잡은 여산 송씨 집안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뒤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한다. 양주시에서 뒤뜰이란 땅이름은남면 신산리, 광적면 광석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일정지역 뒤에 있는 들판 혹은그 들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348번지 일대이다.
■ 사거리
선암리의 중심에 있었던 사거리 혹은 그 사거리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동쪽으로 새말, 서쪽으로 뒤들, 남쪽으로 나리골과 굿배미, 북쪽으로 능골로 가는 네 갈래의 길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사거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다만 현재는 주위에 새로운 길이 나면서 사거리는 그 모습이 없어지고, 사거리 마을 또한 모두 논과 밭으로 변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곳이 번화한 거리였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있어, 땅이름과 관련된 전설이전해내려 오고있다. 양주시에서는 양주1동의 유양동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뜻은 같다. 375-5(도)번지 일대에 있었다.
■ 산골마을·산곡(山谷)
굿배미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상패천을 사이에 두고 굿배미 남쪽에 바라보이는 마을로 도락산 자락의 산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산곡(山谷)이다. 산골마을의 뒷산은 도락산 자락에 위치한 꽃산 혹은 화초산(花草山)이라 불리는 산으로, 봄이 되면 북향 음지쪽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보는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데, 아마도 굿배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꽃이 많이 핀 산으로 인식되어 꽃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꽃산 동쪽의 계곡 산골에 형성된 마을이 산골마을이다. 175-9번지일대이다.
■ 상신촌(上新村)·윗새마을
새말 안에서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능골과 굿배미에 정착한 여산 송씨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 집안사람들이 증가하자, 분파를 형성하며 새롭게 만든 마을인 신촌(新村), 즉 새말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위 쪽 부분, 즉 북쪽에 해당한다고 하여 윗새마을 혹은 상신촌(上新村)이라 불려졌다. 384-3번지 일대이다.
■ 신촌(新村)·새말
나리골 북쪽에 새롭게 만들어진 마을이다. 상신촌(윗새말)과 하신촌(아랫새말)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골과 굿배미에 정착한 여산 송씨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 집안 사람들이 증가하자, 분파를 형성하며 새롭게 만든 마을로 신촌(新村), 즉 새말로 불려졌다. 양주시에서 신촌이란 땅이름은 회천4동의 옥정동, 백석읍 방성리, 광적면 우고리·덕도리에서, 새말이란 땅이름은 광적면 가납리·덕도리, 장흥면 울대리·삼하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일정한 시기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뜻이다. 384-3번지일대와 27번지 일대이다.
■왜골·왜꿀·외골→하신촌
■하신촌(下新村)·아래샛말
신촌, 즉 새말에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능골과 굿배미에 정착한 여산 송씨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 집안사람들이 증가하자 분파를 형성하며 새롭게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그 중 아랫쪽 부분, 즉 남쪽에 해당한다고 하여 아랫새마을, 즉 하신촌으로 불려졌다. 이 마을은 왜가리가 많았기 때문에 왜골·왜꿀·외골이라고도 불려졌는데, 일설에는 다른 지역과 외떨어져 있는 마을이라서 외골이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양주시에서 아랫샛말이란 땅이름은 장흥면 일영리에도 있으며, 왜골이라는 땅이름은 양주1동의 유양동에 나타나는데, 유양동의 왜골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많이 죽은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27번지일대이다.
■학교앞
은현초등학교 앞에 있는 마을이다. 1935년 은현공립보통학교(4년제 2학급)가 개교한 후 학교주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학교 앞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학교앞’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227-3번지일대이다.
○군논
뒤들의 담뒷논 남쪽에 있는 논이다. 여우논 동쪽에 있다. 원래 ‘궁논’이라고 불리우던 것이 발음이 변하여 ‘군논’이 되었다. 이곳은 부근의 땅보다 지대가 낮아 마치 소먹이를 주던 구유(괭)처럼 물이 항상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불려졌다. 뒤들마을에 속해있는 논이었으므로 뒷들논이라고도 하였다. 320번지 일대이다.
○굿배미고개
굿배미에서 나리골, 혹은 나리골에서 굿배미로 넘나드는 고개이다. 굿배미와 나리골은 나지막한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이곳 고갯길을 통해 두 마을 사람들이 오고 갔으며, 특히 이곳에 터전을 잡고 대대로 살아온 여산 송씨 사람들이 자주 통행하였던 고갯길이다. 40-1(도)번지 부근이다.
○굿배미앞벌
굿배미 마을 남쪽 앞에 있는 넓은 들판이다. 신천의 상류인 상패천이 휘돌아 나가면서 만든 퇴적층에 발달된 벌판으로 매우 기름져 굿배미사람들의 양식을 조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벌판이다. 207번지 일대이다.
○귀능지고개
뒷들에서 사거리, 즉 나리골과 신촌 쪽으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이다. 현재 은현면사무소에서 나리골 쪽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 어느 해에 큰 홍수가 났는데, 이 마을에서 사용하던 구유(말이나 소에게 먹이를 주는 밥그릇)가 넘어가 ‘구유가 넘어간 고개’라는 뜻에서 ‘괭재(양주에서는 구유를 괭이라고 부른다)’라고 불리던 것이 규릉재〉귀능재〉귀능지로 바뀌었다. ‘귀능지’라는 말 자체가 고개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고개’가 덧붙여져 ‘귀능지고개’라 불리었던 것이다. 일설에는 이곳에 깊은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 용 아홉 마리가 살고 있어 ‘구룡지(九龍池)’라 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규릉재’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와전으로 생각된다. 산30번지와 산27번지 사이에 있다.
○꽃산·화초산
은현면사무소 남쪽 약 400m 거리, 즉 굿배미마을과 상패천 남쪽에 위치한 산이다. 현재 은현초등학교 뒷산으로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굿배미마을과 뒤들에서 바라보이는 이 산은 봄이 되면 북향 음지쪽에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는데, 꽃이 만발한 산이라는 뜻에서 꽃산으로 불리었고 이것이 한자어인 ‘화초산(花草山)’으로 쓰여졌던 것이다. 정상부근은 산62-2번지이며, 도하리와 용암리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나리골고개
나리골에서 뒷들, 혹은 뒷들에서 나리골로 넘나들던 고개이다. 나리골과 뒤들을 오고가는데 있어 가장 빠른 지름길로 이용하던 고갯길이었으나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있다. 산35번지 북쪽끝자락에 있다.
○담뒷논
뒷들 서쪽에 있는 논이다. 군논 북쪽에 있으며, 말 그대로 뒷들마을 담뒤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담뒷논이라고 불려졌다. 475-3번지 일대이다.
○대왕전(大王田)
굿배미 북동쪽에 있는 논밭으로 대왕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대왕전이라고 불려졌다. 조선왕조 제14대 임금인 선조가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셋째 딸이자 자신에게는 고모가 되는 정순옹주(貞順翁主: 여성군 송인의 부인)의 장례 때 장지가 있는 이곳까지 몸소 와서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농지로 변하였으나 여산 송씨 가문에서는 아직도 이곳을 성스러운 장소로 여기고 있다. 30번지 일대이다. 산45-1번지에는 여성군 송인과 정순옹주의 합장묘가 위치하고 있다.
○도내개벌·도천전(渡川田)
뒤들 남서쪽, 상패천 북쪽가에 있는 들판이다. 동개울과 상패천이 만나 합수(合水)하는 곳에 위치한 벌판으로 개천, 즉 내를 건너는 곳에 위치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22-2번지 일대로 동개울을 사이에 두고 운암리와 경계가 되는 지점에 있다.
○동개울
뒷들의 담뒷논과 군논 사이를 흐르는 개울이다. 남쪽으로 흘러 상패천과 합류하는데, 이 개울이 바로 운암리와 선암리의 경계가 된다. 522-2번지 서쪽끝과 운암리 45-1(구)번지 사이에 있다. 아마도 ‘넘나드는 개울’이라는 뜻의 도내개울이 발음되는 과정에서 ‘동개울’로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양주시에서는 은현면 용암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이곳은 원터동 쪽을 흐르는 개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뒷들고개·뒷뜰고개
나리골 서쪽, 뒷들 북쪽에 있는 고갯길로, 현 은현면사무소에서 하패리 낙락골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선암리와 하패리의 경계가 된다. 뒷들마을 뒤에 있기 때문에 뒷들고개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일설에는 마전재고개라고도 하는데, 아마도 삼밭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듯하다. 산22번지에 있으며, 하패리 산60번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뒷들논 → 군논
○마구터
굿배미에 있는 터로 말을 매어 두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왕조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사위이자 정순옹주의 남편인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죽자 그 상여를 매고 민씨네가 소유한 산을 넘게 되었는데, 산 주인이 못 넘게 하므로 시비가 벌어졌다. 이때 장례식에 참가한 기마병들이 이들을 말렸는데, 당시 기마병들이 말을 매었던 곳이 이곳이라 한다. 당시 기마병들이 진을 치고 있던 진터벌은지금 농지로 변했다고 한다. 57번지 부근이다.
○마당바위
굿배미 동쪽, 상패천이 돌아 나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모양이 마당처럼 넓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서는 회천1동의 봉양동, 장흥면 교현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넓은 바위라는 뜻에서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60-3번지에 있다.
○마전재고개
나리골서쪽, 뒷들 북쪽에 있는 고갯길로 현 은현면사무소에서 하패리 낙락골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선암리와 하패리의 경계가 된다. 아마도 삼밭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불려진 듯하다. 뒷들마을 뒤에 있기 때문에 뒷들고개라는이름으로도 불려졌다. 산22번지에 있으며, 하패리 산60번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먹캥이·목캥이
선암리 남동쪽 도락산 자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현 선암리 산골 마을을 지나 용암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북서쪽으로 보이는 길고 좁은 골짜기로, 마치 사람의 목같이 좁고 기다란 골짜기란 뜻에서 목캥이 또는 먹캥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124번지 일대이다.
○병풍바위
굿배미 동쪽, 새말 남쪽 상패천 가에 있는 바위이다. 용암리 득성마을을 끼고 휘감아 돌아나가는 상패천의 북쪽 산자락에 마치 병풍처럼 기암절벽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이와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선암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용암리 득성마을 사람들에게 보다 널리 알려져 있다. 양주시에서는 양주1동의 어둔동, 은현면 용암리·하패리, 남면 신암리·황방리, 장흥면 부곡리·삼상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병풍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붙여진 명칭들이다. 산44-4번지에 있다.
○부마산소
굿배미에 있는 산소이다. 조선왕조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사위 송인(宋寅, 1517∼1584)의 묘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중기 명문장가로 알려진 송인의 자는 명중(明仲), 호는 이암(灑菴)이며, 시호는 문단공(文端公)이다. 종종의 셋째 딸인 정순옹주를 부인으로 맞아 여성위(礪城尉)에 봉해졌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하였다. 그의 문장실력은 탁월하여 무수한 글을 남겼으며, 특히 인근에 있는 유명한 비문은 모두 그가 지은 것이다. 3년 먼저 돌아간 부인과 함께 나지막한 언덕에 묻혀있는 그의 묘소 앞에는 1644년(인조22) 조성된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의 위치를 양주 소라산자락에 뱀을 감싸 안고 있는 형국[포사·抱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산45-1번지에 있다.
○사거리고개
뒤들 동쪽, 사거리 서쪽에 있는 고개로 뒤들과 사거리를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현재 고개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대지로 변했다. 356-6번지 부근이다.
○산골고개
산골에서 목캥이를 지나 용암리 묵은 논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선암리와 용암리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산49-3(도)번지에서 용암리 844-2(도)번지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새말고개
새말 즉 신촌에서 하패리의 선업리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를 넘어 하패리의 선업리를 거쳐 동두천시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나있다. 산12번지에서 하패리 산118-1번지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서낭고개
굿배미에서 상패천 쪽으로 나가는데 있는 고갯길로, 굿배미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상패천을 건너 산골 마을 입구를 지나 용암리 쪽으로 다녔다. 굿배미 마을의 입구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곳 고갯마루에 성황당이 있었고, 그 때문에 성황당고개〉성황고개〉서낭고개로 불려졌다. 현재는 성황당이 없다. 210번지 부근이다.
○선녀바위 →선돌바위
○선돌고개
은현면사무소 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뒤들에서 남쪽 도내개벌 방향으로 나온뒤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굿배미마을을 넘나들던 고개길이다. 이곳에선 돌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선돌바위와 부근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수많은 시인과 묵객(墨客)들이 지나쳤을 것이며, 특히 송인을 비롯한 여산 송씨 문장가들이 바로 이곳 선돌부근의 풍경을 벗삼아 재능을 키워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286번지 부근이다.
○선돌바위
뒤들 동쪽, 상패천 가에 있는 높이 10.5m, 너비 60여m의 바위이다. 바위 위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몇 그루의 나무가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선암리라는 마을이름의 유래는 바로 이 선돌바위에서 시작된다. 원래 서있는 돌이라는 뜻에서 선돌, 즉 입석(立石)으로 불렸던 이 바위는 선돌할머니가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일설에는 선녀가 이 바위에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는 옛노인의 말에 따라 선녀바위라고도 불리며, 혹은 신선이 서있는 모양과 같다하여 신선바위라고도 한다. 양주시에서는 회천4동의 율정동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288-8번지에 있다.
○소래산(蘇萊山)·소라산(蘇羅山: 所羅山)·송라산(松蘿山)
선암리 동쪽 끝부분에 위치한 높이 228.8m의 산으로 선암리·용암리·하패리에 걸쳐 있다. 소라산이라는 땅이름은 16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그 이름이 처음 나오기 시작하는데, 한자로는 ‘소라산(所羅山)’으로 표기하였다. 이후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각종 지도와 경기도읍지 등에 소라산(所羅山)·소라산(蘇羅山)·소래산(蘇萊山)·송라산(松蘿山) 등의 명칭으로 쓰여져 왔다. 현재 소래산은 신천을 사이에 두고 3번국도인 평화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양주와 동두천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바라볼 수 있다. 소래산 정상은 산2번지와 용암리 산14-1번지 및 하패리 산136-1번지 경계부분이다(자세한 내용은 은현면 용암리의 ‘소래산’을 참조).
여승이 쓰는 송라립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소라산은 높이 228.8m의 나지막한 산이다.
○송논
뒤들의 군논 남쪽, 식목수들 동쪽에 있는 논이다. 이곳의 이름이 왜 송논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소라산, 소나무 혹은 송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300번지 부근이다.
○승금재
은현면사무소 남동쪽에 있는 산이다. 이 산너머가 바로 굿배미마을이다. ‘신금재’라고도 불리는데, 왜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옛용어 중에 ‘신궁(新宮)’은 임금의 왕자와 공주 및 옹주가 거처하는 곳을 이르는 말이므로, 송인의 부인이 된 정순옹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곳을 신궁산, 혹은 신궁재로 부르다가 발음이 변하여 신금재 〉승금재가 된 듯싶다. 다른 이름으로는 대들봉이라고도 한다. 산39번지 일대이다.
○식목수들
뒤들 남서쪽에 있는 160여 평 규모의 들판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지관과 함께 묘지를 정하기 위해 감악산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지형을 계속 살펴보고 오다가 이곳에 도착하였다. 이때 지관이 “이제서야 명당을 찾았다”고 무릎을 치면서 “이곳이 명당이라면 주위에 승금재·구룡지·화초산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옆에 있던 사람이 “그렇다”고 하자, 지관이 “명당이 분명하다. 그리고 3척(尺)만 파면 너레바위(사방 1m)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 너레바위를 캐지 말고 그 위에 묘를 써야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주인 맏아들이 너레바위를 캐내고 묘를 써야 된다고 주장하므로 그렇게 한 결과 파명당(破明堂)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와 관련된 산소가 있다. 현재 덕정사거리에서 적성으로 가는 56번 국도에서 은현면사무소로 갈라지는 삼거리의 오른편으로 식목수들이 있다. 예전에 운암리 구미마을에서 굿배미로 넘어오던 거지들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여기에 거지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524번지에 있다.
○신선바위→선돌바위
○여우논
뒤들의 외미논 바로 북쪽, 군논 서쪽에 있는 논이다. 비가 오면 물이 고였다가 그치면 금새 물이 빠지므로 여우같이 변덕을 부리는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서는 백석면 오산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494번지에 있다.
○외미논
뒤들 남서쪽에 있는 논이다. 뒤들 마을에서 보면 구석지고 외진 곳에 있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운암리와 경계가 되는 곳에 위치한 논으로 500번지 일대이다.
○절터골
나리골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주춧돌이나 기와장이 발견된다고 한다. 양주시에서는 양주1동의 남방동, 양주2동의 삼숭동, 백석읍 방성리, 은현면 운암리·도하리, 남면 신산리, 장흥면 부곡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모두 절터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산7번지에 있다.
○정순옹주(貞順翁主)의 묘
여성군 송인의 부인인 정순옹주의 묘가 있는 곳이다. 정순옹주의 묘가 문헌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1871년 및 1899년판 양주목읍지에서 연속적으로 소개되었다. 읍치에서 북쪽으로 30리 되는 거리인 묵은면 혹은 진답면에 있다고 하였다. 정순옹주는 조선왕조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셋째 딸이자 제14대 임금인 선조의 고모가 되는 분으로, 온화한 성품으로 집안을 화목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45-1번지에 있다.
○진터
대왕전 동쪽에 있는 들판이다. 조선왕조 제14대 임금인 선조가 자신의 고모인 정순옹주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이곳에 왔을 때, 왕을 호위하기 위해 함께 온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8번지 일대이다(자세한 내용은 대왕전을 참조).
○찬우물
함방비산 동쪽 끝자락에 있는 우물이다. 양주시에서는 회천1동의 봉양동, 양주1동의 산북동, 은현면 용암리에 같은 이름이 나오는데, 모두 차고 깨끗한 물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산36번지 동쪽 끝에 있다.
○큰골지봉
굿배미 남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산골마을 뒤쪽에 있는 산으로 용암리와 도하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정상부근이 산57-14번지이다.
○함방뒤고개
능골에서 하패리의 선업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함방비산 뒤쪽에 있다 하여 함방뒤고개로 불려졌다. 산15-1번지이다.
○함방비산
뒤들 동쪽에 있는 산이다. 승금재와 같은 자락의 산으로 원래 한방(큰방)뫼로 불리우던 것이 달리 발음되면서 한방뫼산〉함방뫼산〉함방비산으로 와전된 듯싶다. 이곳에 있는 여산송씨 집안 및 정순옹주의 묘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산34번지이다.
○활터고개
선암리에 있는 고개이다. 활을 쏘며 군사훈련을 하던 곳에 있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서는 백석읍 홍죽리, 은현면 도하리, 광적면 효촌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근처에 활 쏘는 터가 있던 고개라는 뜻이다. 산3-5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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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운암리(雲岩里)
운암리(雲岩里)는 은현면 안에서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으로 선암리·하패리, 서쪽으로 남면 상수리·입암리, 남쪽으로 도하리, 북쪽으로 봉암리와 접해있다. 운암리란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4년이다. 대한제국기까지 만해도 묵은면·현내면 및 적성군 남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묵은면(默隱面)의 삼패리(三牌里)·삼패하리(三牌下里) 전부와 이패리(二牌里) 일부, 현내면(縣內面) 하패리(下牌里) 일부, 적성군 남면 입암리(笠巖里)·발운리(發雲里) 일부를 합하여 운암리라 불렀다.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나와 있다. 운암리란 땅이름은 발운리(發雲里)의 ‘운(雲)’자와 입암리(笠巖里)의 ‘암(巖)’자를 합해 만든 것이다. 혹은 구름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운암리의 대부분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 위치한 남면 상수리와 선암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발전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운암리 남쪽지역을 지나가는 56번 도로를 중심으로 한 곳과, 남면 상수리·입암리와 인접한 평지쪽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말·간댓말
방주골과 웃말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다. 말 그대로 가운데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양주시에서도 가운데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3동의 고암동, 양주1동의 산북동, 은현면 도하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두 마을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447번지 일대이다.
■거지고개 → 웃말
■곳창재·골창지
방주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은현면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남면 상수리로 가는 국도 56번도로 언덕길가에 있었던 마을이다. 이곳은 대한제국기까지만 해도 묵은면(默隱面)에 소재하면서 삼패하리(三牌下里)로 불린 독립적인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른 지역과 함께 적성군 남면 운암리에 편성되었다가 다시 은현면 운암리로 개편되었다. 인근에 있었던 갓바위장과 관련하여 물건보관창고가 있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이름으로는 골창재라고도 불렀다. 근처에 곳창재고개가 있다. 495-15번지 일대에 있었다.
■괘재·괘현(卦峴혹은 掛峴)
괘재고개 인근에 형성된 마을이다. 괘재(232-1[도]번지)라는 땅이름은 이 고개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고개마루에서는 허리를 짚고 쉬어간다 하여 허리걸 ‘괘(掛)’자를 사용하여 괘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그 부근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괘재마을로 불려지게 되었다. 양주시에서 괘재 혹은 괘현이라는 땅이름은 은현면 하패리에도 나타난다. 414번지 일대에 있다.
■구미(龜尾)
구수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거북이 꼬리처럼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거북이의 모양을 가진 거북바위의 꼬리부분이 이 마을을 향하고 있어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옛묵은면 상패삼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331번지 일대이다.
■구수마을[龜首-]·구수고개
괘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운암리의 으뜸 되는 마을이다. 옛날에 거북이모양의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가 이 마을을 향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농경지가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앞과 뒤(동쪽과 서쪽)에 벌판이 펼쳐져 있어 벌말이라고도 한다. 양주시에서 벌말이란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2동의 회정동, 양주1동의 삼숭동, 백석읍 연곡리, 은현면 운암리, 광적면 석우리, 장흥면 삼상리에서도 확인되는데, 모두 넓은 벌판에 조성된 마을이라는 뜻이고, 일부는 한자로 평촌(坪村) 혹은 야촌(野村)으로 불리기도 한다. 430번지 일대이다.
■기와골
괘재마을 북동쪽에 위치한 골짜기 혹은 그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기와가마가 있어 기와골이라 불리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혹은 옛날 이곳에 큰기와집이 있었기 때문에 기와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전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이름으로는 기름채골이라고도 한다. 281번지 일대이다.
■바깥말
발운마을의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실제 발운마을은 안말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으니, 그에 대칭하여 바깥말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양주시에는 광적면 덕도리, 장흥면 일영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일정한 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77-1번지 일대이다.
■발운마을[發雲-]·배루니·바루니·물가배루니
방주골 남동쪽의 상패천 가에 있는 마을이다. 상패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발운마을 앞 한림바위 근처에서 돌아나가면서 물과 돌이 부딪쳐 항상 물안개가 피어오르는데, 이것이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는듯하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구수고개 쪽에서 보면 제일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안말이라고도 불리운 상패천가에 있는 한림바위. 이 바위에 물이 부딪치면 포말이 일어나 마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하여 발운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겨났다. 발운리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음이 변하여 발운리〉바루니〉배루니 등으로 변화되었는데, 양주시에서 배루니·바루니라는 땅이름은 남면 상수리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두 마을이 대한제국기까지만 해도 적성군 남면 발운리(發雲里)에 속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일부는 은현면 운암리로, 또 다른 일부는 남면 상수리에 각각 편입되었다. 한편 1842년판 적성현지에 따르면, 적성현의 대표적인 장으로 발운장(發雲場)을 소개하면서 매월 2일·7일·12일에 5일 간격으로 시장이 열렸다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바로 남면 상수리의 갓바위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갓바위장에 대해서는 남면 입암리와 상수리 참조). 물가배루니라는 땅이름 역시 물가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안개가 끼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현재 발운리는 모두 공장지대로 변하였고, 한림바위도 많이 파손되어 옛모습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패천의 오염으로 발운리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양주시에서 안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양주1동의 남방동·마전동, 은현면 도하리, 남면 신산리·상수리, 남면 황방리, 광적면 가납리·효촌리·덕도리, 장흥면 교현리·일영리에서도 확인되는데, 모두 일정한 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96번지 일대이다.
■방주골·방축마을[防築-]
구수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약 200여 년 전 이 마을근방에 큰 방축(防築)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방축은 모두 논으로 바뀌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이름으로 그 흔적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구수마을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다른 말로 아랫말이라고도 불린다. 양주시에서 아랫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양주1동의 산북동, 양주2동의 광사동·고읍동, 백석읍 복지리, 은현면 운암리·하패리·도하리, 남면 신암리, 광적면 효촌리·석우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삼하리에서도 확인되는데, 모두 일정한 지역을 기준으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60번지 일대이다.
■벌말 → 구수마을
■서도리(西道里)
곳창재와 방주골의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서쪽으로 길이 나있어 붙여진 이름이라하나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이곳에 위치한 오흥시묘비석(1806년 세워짐. 전면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임)에 이 마을 명칭이 분명히 나오고 있어, 예전부터 서도리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477번지 일대이다.
■아랫말 → 방주골
■안말 → 발운마을
■여우골·여의동(如意洞)
괘재고개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여우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여우골 주변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다른 마을과는 외떨어져 있으므로 외골이라고 불렸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여우골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여의동(如意洞)은 ‘여우’라는 발음을 본뜬 것이다. 양주시에서 여우골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덕정동, 회천2동의 회암동, 백석읍 방성리, 남면 구암리에서도 확인되는데, 모두 외떨어져 있으며 여우가 자주 나타나는 골짜기 혹은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구미로 넘어가는 고개를 여우고개라고 한다. 364번지 일대이다.
■웃말
발운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 혹은 그 고개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다. 이 고개가 바로 남면 상수리와의 경계이다. 한국전쟁 직후 거지들과 나환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 하여 거지고개라고도 한다. 현재는 군부대가 들어서 있다. 양주시에서 웃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산북동, 양주2동의 광사동·고읍동, 백석읍 복지리·연곡리, 은현면 용암리, 남면 신산리·구암리에서도 확인되는데, 모두 일정한 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편 거지고개라는 땅이름은 백석읍 홍죽리, 은현면 하패리, 남면 상수리에서도 확인되는데, 모두 거지가 살거나 자주 나타나는 고개 혹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486-1(도)번지 일대이다.
○곳창재고개
발운리 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곳창재에 위치한 고개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곳창재고개는 발운리 북쪽, 방주골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고개로 은현면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남면 상수리로 가는 56번 국도에 위치한 언덕이다. 495-7(도)번지 부근이다.
○괘재고개·괘현(掛峴)
구수마을에서 여우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지나는 행인들이 이고개에서는 허리를 짚고 쉬어간다 하여 허리걸 ‘괘(掛)’자를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양주시에서 괘현이란 땅이름은 은현면 하패리에서도 확인된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해서 괘재 혹은 괘현(卦峴·掛峴)으로 불리는 마을이 조성되어있다. 213-1번지에 있다.
○기름채골 → 기와골
○기와골
괘재마을 북동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기와가마가 있어 기와골이라 불리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혹은 옛날 이곳에 큰 기와집이 있었기 때문에 기와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전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이름으로는 기름채골이라고도 한다. 281번지일대의 골짜기이다.
○능모퉁이밭
괘재마을 인근에 있는 밭이다. 여우골을 둘러싼 산지 남쪽 끝, 괘재고개 동쪽 자락 산모퉁이가 돌아나가는 곳에 있으며, 산능선의 모퉁이에 위치한 밭이라는 뜻으로 ‘능모퉁이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233번지일대의 밭이다.
○돌산
괘재마을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선암리와 접해있으며 이곳에서 나는 돌로 비석을 만든다. 지금도 채석행위가 이루어진다. 산39번지에 있다.
○들산 → 봉바위산
○박석고개 → 박수고개
○박수고개
상수리에서 운암리로 넘어오는 고개이다. 남면 발운리 쪽(현 상수리)에 박수무당이 살았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나 이는 와전인 듯싶다. 실제로 이곳에는 박석(薄石) 즉 얇은 돌이 많아 박석고개라 불리던 것이 변하여 박석고개〉박수고개로 되었다. 이 고개는 원래 흙길이었는데 사람과 우마차가 지나다니면서 길이 패이고, 더욱이 비만 오면 질퍽거리므로 인근 돌산에서 생산되는 돌파편을 이곳에 깔아 불편함을 없앴다고 전한다. 박석고개라는 이름은 양주시에서 백석읍 오산리, 은현면 하패리, 남면 상수리에 나타나며, 박수고개는 광적면 덕도리에서도 확인된다. 산90-1(도)번지 부근이다.
○백냥자리
구수마을 서쪽에 있는 논으로 서쪽에 입암천이 흐르고 있는 아주 기름진 농경지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어느 양반이이 땅을 백냥에 샀다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되었다고 한다. 혹은 100냥만큼의 쌀이 생산된다 하여 이러한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현재 이 논은 모두 경지정리가 되어 중요한 쌀생산 토지로 활용되고 있다. 353-5번지 부근이다.
○범바위
괘재마을 북동쪽 산에 있는 바위이다. 범처럼 생긴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부엉새가 살고 있는 바위라 하여 부엉바위 〉봉바위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범바위라고 불린 듯하다. 양주시에는 백석읍 방성리, 광적면 효촌리, 장흥면 석현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범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는 뜻이며, 장흥면 석현리의 범바위는 한자로 호암(虎岩)으로 불린다. 산31-1번지에 있다.
○벽장바위
구미마을 동쪽 산자락에 위치한 바위로 마치 벽장처럼 생긴 바위라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산9-1번지에 있다.
○봉바위산
봉바위가 있는 산이라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실제 이 산에는 부엉새가 살았던 부엉바위가 있는데, 부엉바위·봉바위·범바위 등으로 불리면서 부엉바위가 있는 산이라는 뜻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들산이라고도 한다. 산31-1번지이다.
○부엉바위
부엉이가 이곳에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서는 양주1동의 마전동, 광적면 가납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부엉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는 뜻이다. 산31-1번지에 있다.
○서낭당고개
발운리에서 곳창재로 나오는 길목에 있는 고개이다. 근처에 서낭당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예전에 서낭당의 구실을 하였던 참나무가 현재도 서있다. 양주시에는 양주2동의 고읍동, 백석면 방성리·홍죽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역시 근처에 서낭당이 있거나 있었던 고개라는 뜻이다. 산80번지 남쪽 끝자락 부근이다.
○숭논고래
괘재마을 남쪽에 있는 논이다. 항상 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水)논고래가 변하여 순논고래〉숭논고래로 변하였다. 200번지일대의 논이다.
○에너머
은현면사무소 남서쪽에 있는 넓은 벌판 논이다. 운암리와 선암리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는 논으로 방주골 남동쪽에 있는 논이다. 이 논을 북서풍의 찬바람으로부터 막기 위하여 방축을 쌓았고, 방주골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너머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 139-4번지일대이다.
○여우고개
여우골에서 구미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에 여우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서는 양주1동의 유양동·남방동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364번지에 있다(자세한 내용은 위의 ‘여우골’을 참조).
○옥당불[獄堂-]
예전에 이곳에 감옥이 있었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 감옥에서 사람이 많이 죽어나갔다고 하며, 근처에 뱀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400여 평 부지에 큰 바위가 널려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모두 논으로 변하였다. 187번지 일대이다.
○절터골
괘재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는 양주1동의 남방동, 양주2동의 삼숭동, 백석읍 방성리, 은현면 선암리·도하리, 남면 신산리, 장흥면 부곡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절터가 있거나 있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264번지 일대이다.
○태봉산
운암리와 봉암리, 하패리의 경계지점에 걸쳐있는 산이다. 옛날에 이 산 정상에 태를 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 정상에는 태를 보관한 큰 돌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비석만이 남아 있다. 산13번지이다. 봉암리는 산71-2번지, 하패리는 산30번지이다.
○학무재
괘재마을에서 여우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곳에 있던 송판서의 산소를 그 후손들이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파자, 학이 춤추며 날아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학무재[鶴舞-]라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할미재라고도 한다. 산22번지에 있다.
○할미재 → 학무재
○홀짝고개
괘재고개 북쪽에 있는 고개로 여우골과 구미마을을 넘나들던 언덕이다. 옛날에 이곳에서 어느 남녀가 정을 통하다가 노인들에게 들켜서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 후 밤이 되면 처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양주시에는 광적면 우고리·덕도리에도 같은이름이 보이는데, 광적면 덕도리의 홀짝고개는 길이 홀쭉한 고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산7번지에 있다.
○홍감사등
여우고개 남쪽에 있는 등성이이다. 옛날에 홍감사의 묘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30-8번지 일대이다.
○홍삼산
방주골 북쪽에 있는 산이다. 왜 이러한 이름이 붙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산44-1번지의 산을 가리킨다. 도움말: 손진석(89), 최병희(83), 최병옥(78) 봉암리(鳳岩里)는 은현면에서 북쪽 끝에 위치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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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봉암리(鳳岩里)
봉암리(鳳岩里)는 은현면에서 북쪽 끝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과 북쪽으로 동두천시, 서쪽으로 남면 황방리·한산리·입암리, 남쪽으로 운암리·하패리와 접해 있다. 원래 논밭으로 이루어진 지역이었는데, 1952년 미군의 주둔(현재는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음)과 더불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봉암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후반인데, 이는 오늘날의 봉암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즉 호구총수(1789)에 나온 이담면(伊淡面: 현 동두천시) 봉암리(鳳岩里)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나온 상
봉암리(上鳳岩里)는 오늘날의 봉암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들 지역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은현면에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봉암리는 1914년 새롭게 형성된 행정구역으로, 개편이전의 묵은면(默隱面) 사패리(四牌里)·현내면(縣內面) 하패리(下牌里)·이담면 안흥리(安興里)·적성군 남면 한산리(閑山里) 등 4개리에서 일부지역을 떼내어 봉암리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실려 있다. 봉암리라는 땅이름은 봉암(鳳岩) 즉 봉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봉데미고개를 비롯하여 봉암리 일대에 바위가 많았기 때문이다. 봉암리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항상 물이 많고 좋았으며, 산에는 소나무와 밤나무가 숲을 이루
어 왜가리·황새 등이 항상 날아와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냈다고 한다. 실제 봉암약수터 주변의 산세와 약수물은 이 지역사람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현재 봉암리에는 여말선초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표적인 표본인 충신 남을진(南乙珍)의 묘와 정절사(旌節祠) 등 역사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에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는 관계로 예전 모습에서 많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동이점
봉암리 중심지에서 남쪽 개천 부근에 있었던 마을이다. 동이흙, 즉 독을 만드는 흙이 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이곳에서 나는 흙으로 동이를 빚어 내다 팔아먹고 살던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모두 경지정리가 되어 논으로 바뀌었다. 양주시에는 은현면 용암리에서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동이를 만드는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432번지 일대이다.
■마산마을
현 봉암저수지 동쪽에 있는 마을로 봉암리에서 가장 북쪽에 있다. 남면 황방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간패고개 주변에 형성된 마을로 어떤 이유로 마산마을이라는이름이 붙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연천 쪽에 있는 마차산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실제 간패고개를 넘으면 바로 마차산이기 때문이다. 한편 마산마을은 양지편이라고 불리는데, 양지 쪽에 자리 잡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서 양지편이라는 땅이름은 장흥면 삼하리에서도 보인다. 역시 양지쪽에 있는 마
을이라는 뜻이다. 316번지 일대이다.
■비석굴
비석골이라고도 한다. 서원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표상인 남을진 선생의 신도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841년 조성된 남을진신도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고려말의 충신 남을진(南乙珍,1331∼1393)은 정치가 문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사천현(沙川縣: 현봉암리 주변) 봉황산으로 돌아갔다. 이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벼슬에 나아가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고사하였다. 이성계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그의 충절을 높이 사 사천백(沙川伯)에 봉하였는데, 남을진은 통곡하기를 “내가 산속 깊이 들어가지 못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노라”라고 하면서, 드디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감악산 석굴 속에 들어가 눈으로 햇빛을 보지않고 석굴 밖의 땅을 밟지 않으면서 세상을 마쳤다. 이후 3일 동안이나 흰구름이 항상 그 위를 맴돌았는데, 시신을 거두어 굴 밖으로 나오니, 큰 바람이 일어나면서 굴 속에 있던 책들을 조각조각 날려 보냈다. 이로 인하여 후세사람들은 이곳을 남선굴(南仙窟)이라 부르게 되었다. 남선굴 위에는 또하나 의 굴이 있어 그 속에 조그만 석상이 있는데, 그 형상은 머리를 흐트러트린 모습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조식과 임규(任奎)의 문집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묘는 사천 남쪽의 임간리(臨澗里) 언덕에 조성되었다고 하였다. 남선굴은 현재 남면 신암리에 있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남면 신암리 남선굴’을 참조). 24번지 일대이다.
■삼조계
서원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趙)씨 성을 가진 집이 세 채 있었다 하여 삼조가(三趙家)라고 불리던 것이 변하여 삼조개〉삼조계가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도 집이 세 채 있지만 조씨는 없다. 78번지 일대이다.
■새터마을
터못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로 만들어진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부근 산자락에 사천서원이 만들어지면서 새롭게 마을이 형성되어 새터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사천서원이 문을 닫게 되자 마을이 점차 축소되어 현재는 몇 집 남지 않았다. 102번지 일대이다.
■서원말·서원동(書院洞)
오금동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비석굴·터못계·새터·승방모퉁이·삼조계를 모두 아우르는 마을이름이다. 옛날 이 마을에 큰 서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원은 사천서원(沙川書院) 즉 정절사(旌節祠)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려 말의 충신으로 조선왕조의 참여를 끝까지 거부한 남을진(南乙珍)과 조견(趙俱)을 모신 사당이다.
정절사는 여러 문헌 및 지도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감악산에서 굶어 죽은 고려말 충신 남을진묘소 사창(社倉) 등과 함께 양주목을 대표하는 주요 건물로 기록되었다. 1842년판 양주목읍지에 따르면, 당시의 정절사는 1712년(숙종52)에 세워졌고, 1784년(정조8)에 왕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았으며, 원생(院生) 15명 등이 소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위치는 원래 산58-3번지에 있었으나 내시인 상선(尙膳) 이민하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이후 정절사는 터만 남은 채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1999년 9월 산50-2번지에 다시 정절사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승방모퉁이
서원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혹은 옛날 사천현감영의 보초들이 지키는 곳이 이곳에 있었기에 이런 이름으로 불리웠다고도 한다. 신방마을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현재 봉암약수터 입구에서 정절사로 향하는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141번지부근이다.
■신방마을 → 승방모퉁이
■양지편 → 마산마을
■오금동(梧琴洞)·오그미
현 봉암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땅이름의 유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① 이곳에 큰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선비가 이 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 ② 이곳이 사천현으로 불려지던 당시, 이 마을 앞에 감옥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 ③ 옛날에 오금장자 즉 부자가 살았는데, 부엉이가 하도 울어 잡았더니 이로 인해 망하게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등이다. 대개 우리나라 어느 곳이나 오금동이라는 땅이름이 나오는 곳은 오동나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397번지 일대이다.
■터못계·통목계
승방모퉁이와 새터마을 사이에 있는 골짜기 혹은 그 골짜기가 있는 마을이다. 물이 많은 동네이며, 연못이 있던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한다. 116-1번지 부근이다.
○개루니
마산마을 남쪽, 봉암저수지 동쪽에 있다. 큰개루니와 작은개루니로 이루어져 있는데, 개루니라는 말은 개울의 와전으로 큰개루니는 큰 개울, 작은개루니는 작은 개울이 변하여 불리던 말들이다. 실제 큰개루니에는 큰 개울이 흐르고 있고, 작은개루니에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르고 있다. 큰개루니는 347번지 부근이고, 작은개루니는 뒤굴이라고도 하는데 295번지 부근이다.
○군논다리
오금동 남쪽에 있는 논이다. 원래는 ‘군논들’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군논드리>군논다리’로 변하였다. 무슨 이유로 군논들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지만, 선암리의 경우 부근의 땅보다 지대가 낮아 마치 소먹이를 주던 구유(괭)처럼 물이 항상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군논으로 불려진 것과 마찬가지로, 바닥이 움푹 파이고 물이 항상 차있기에 이러한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400번지에 있는 논이다.
○높은터
삼바골 동쪽 산기슭 정상에 있는 터이다. 안흥리고개가 이곳을 지나간다. 산31-1번지와 동두천시 안흥동의 경계부분에 있다.
○담배대논
봉암리 중심지에서 봉암약수터로 나가는 남쪽길가에 있는 16평 면적의 작은 논이다. 담배대값과 맞바꾸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55번지의 논이다.
○동냥재
서원말 남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 이곳 서원말에 부자가 있어, 동냥하러 오는 거지들이 들끓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66번지에 있다.
○뒤굴 → (작은)개루니
○매봉재
서원말 동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매가 많이 서식하여 혹은 산봉우리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매봉, 혹은 응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대개 매를 사냥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양주시에는 양주1동의 마전동, 양주2동의 만송동, 은현면 하패리, 남면 매곡리·경신리, 광적면 광석리, 장흥면 일영리·부곡리에서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산50-2번지 동남쪽으로, 하패리 및 동두천시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방아다리
봉암저수지 북쪽 끝에 있었던 다리였다. 마산리 사람들이 개루니에서 나오는 물길을 건너 현 봉암리중심지로 나갈 때 건너던 다리였으나, 현재는 봉암저수지에 수몰되고 없다. 양주시에는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4동의 옥정, 양주2동의 고읍동, 백석읍 방성리·오산리·연곡리, 광적면 가납리, 장흥면 울대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대개 방아 혹은방앗간이 옆에 있는 다리라는 뜻이다. 325-1(구)번지에 있었다.
○벼락바위
옴너머산 북쪽 끝 개울가에 있었던 바위이다. 벼락에 맞아, 혹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서진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없어졌다. 양주시에는 은현면 도하리와 광적면 효촌리에 같은 이름이 보인다. 162-1번지에 있었다.
○봉내미고개·봉데미고개
봉암리에서 하패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근처에 봉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남을진이 하패리 쪽에 은거하였는데 이곳에 바위가 많고 노적가리가 있어 부엉새가 새끼를 치기 때문에 봉황리라 불렀다고도 한다. 예전에는 이 고갯길을통하여 사람들이 넘나들었지만 현재는 바로 옆에 새로운 도로가 뚫리면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산66번지와 산50-2번지 사이의 고개이다.
○봉암시장
봉암리에서 남쪽에 있던 시장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봉암약수터·봉암샘터
서원말 북쪽 옴너머산에 있는 약수터이다. 옻이 올랐을 때 이 물을 마시면 낫는다 하여 옻우물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을 떠다가 마시고 있으며, 약수터 주변에는 체력단련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산42번지에 있다.
○삼바골
개루니 남쪽에 있다. 현재 봉암저수지를 끼고 휘감아 돌아나가는 도로의 동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이 계곡 양쪽에서 사람들이 삼을 심어 길렀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삼밭골이 삼바골로 변하였다. 양주시에는 양주1동의 마전동, 광적면 비암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226번지 일대이다.
○세오개고개
매봉재 남쪽의 사천서원, 즉 정절사와 하패리 낙락골을 넘나들던 고개이다. 큰 세오개와 작은 세오개로 이루어져있다. 원래는 조그만 길이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가는 길고개라고 불리던 것이 가늘다는 뜻의‘세(細)’로 와전되어 세고개로 불렸는데, 이것이 한번 다시 변하여 세오개고개로 정착되었다. 산50-2번지에 있다.
○소란밭
오금동 서쪽에 있는 산자락의 밭이다. 예전에 이곳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385번지 일대이다.
○아욱골
오금동 북쪽, 삼바골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 골짜기이다. 아홉 개의 골짜기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아홉골’로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아옵골> 아옥골>아욱골’로 변하였다. 356번지 부근이다.
○안흥리고개
삼바골에서 높은 터를 지나 동두천시 안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산31-1번지에 있다.
○여우내벌·연애벌
서원말 북쪽에 있는 들판이다. 여우벌의 시내는 비가 올 때마다 물길이 바뀌므로 마을사람들은 마치 여우가 장난치는 것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예전에는 비만 오면 질척질척한 진흙 벌판이었으나, 군부대가 주둔한 이후 봉암리의 중심지로 변하여 지금은 봉암리 시장 등 봉암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마을로 변하였다. 417번지 일대이다.
○옴너머산
매봉재 북쪽에 있는 산이다. 봉암약수터가 있다. 원 즉 서원너머에 있는 산이라 하여 원너머산이라고 불리던 것이 변화여 옴너머산이 되었다. 산42번지이다.
○옻우물 →봉암약수터
○외논머리
오금동 서쪽에 있는 논이다. 산자락 사이에 홀로 떨어져 있는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84번지이다.
○원터
사천서원이 있었던 터이다. 고려 말 충신인 남을진과 조견을 모신 사천서원, 즉 정절사(旌節祠)가 있던 터로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고 한다. 양주시에서는 은현면 용암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산58-3번지에 있었다.
○원터고개
옛날 서원말 새터마을에서 정절사로 넘나들었던 고개이다. 양주시에서는 은현면 용암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산58-3번지에 있다.
○이무기굴
서원말 북쪽의 벼락바위 옆에 있는 굴이다. 옛날 이무기가 살던 굴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두천시와의 경계지점으로 지금은 동두천시 쓰레장이 들어서 있다. 162-1번지에 있다.
○작은개루니
마산마을 남쪽, 봉암저수지 동쪽에 있다. 개루니라는 말은 ‘개울’의 와전으로 작은개루니는 작은개울이 변하여 불리던 말이다. 실제 작은개루니에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르고 있다. 뒤굴이라고도 한다. 295번지 부근이다.
○큰개루니
마산마을 남쪽, 봉암저수지 동쪽에 있다. 개루니라는 말은 ‘개울’의 와전으로 큰개루니는 큰개울이 변하여 불리던 말이다. 실제 큰개루니에는 큰개울이 흐르고 있다. 347번지 부근이다.
○태봉산
봉암리와 운암리, 하패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옛날에 태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우리에는 태를 보관한 큰 돌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석만이 남아 있다. 산71-2번지이다.
○하마비(下馬碑)
비석굴의 남을진 묘소 남쪽산 자락에 있는 비석이다. 비석에는 대소인하마(大小人下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옛날에 말을 탄 사람이 이곳 앞에서 말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 타고 가자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는데, 사람이 말에서 내리자 말이 움직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 하마비는 말에서 내려 예를 표시해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 듯하다. 원래 하마비는 사천서원 주위의 승방모퉁이, 봉데미고개, 그리고 현재 하마비가 있던 자리 바로 밑쪽 등 세 군데에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다. 산58-1
번지에 있다.
(5) 하패리(下牌里)
하패리(下牌里)는 은현면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과 북쪽으로 동두천시, 서쪽으로 봉암리·운암리, 남쪽으로 선암리와 접해있다. 하패리라는 땅이름은 적어도 대한제국기 부터 이곳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이곳은 1914년 이전까지는 현내면(縣內面) 하패리와 이담면(伊淡面) 송라리(松蘿里)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 지역에서 일부를 떼 내어 은현면 하패리로 편성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나와 있다. 하패리란 땅이름은 고려시대의 은현면 지역 즉 사천현(沙川縣)에서 아래 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남쪽의 소래산과 북쪽의 태봉산, 그리고 동쪽의 신천을 사이에 두고 벌판이 넓게 펼쳐진 이곳은 귀평·낙락골·긴재·서내비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현재 하패리는 신천 주변에 공장지대가 들어서면서 예전 농업지역의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양주에서 옛농촌의 모습을 간직한 몇 안되는 지역이다.
■구레들·그네뜰·굴레뜰·귀평(歸坪)
낙락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차산의 봉우리가 끝나면서 돌아앉은 곳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돌아 앉아있는 곳에 있는 들판’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오다가 이것이 한자로 옮겨지면서 귀평(歸坪)이 되었다. 일설에는 옛날 어느 원님이 언덕을 돌아 이곳에 도착하였다 하여, 돌아가는 길에 있는 들판이라 하여 귀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것이 귀의들〉구에들〉구레들〉굴레들〉그네들 등으로 와전되면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달성 서씨 집성촌이다. 동네 뒷산에 돌바위 또는 굴바위가 있는데, 이 산 중턱에 올라 발을 구르면 땅속으로부터 산울리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로 인해 땅 밑에 큰 굴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래서 마을의 노인들은 이곳을 굴의들〉굴레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837번지 일대이다.
■기곡(基谷)
서내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세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성(固城) 남씨(南氏)가 터전을 닦은 마을이라 하여 터골이라 불리다가 그대로 한자로 옮겨 기곡이 되었다. 그래서 일명 고성 남씨촌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고개마루턱에 마을이 있어 턱골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이 변하여 터골이 되었다고도 한다. 양주시에서 기곡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덕정동에서도 보이며, 턱골은 회천1동의 덕정동, 양주2동의 광사동, 백석읍 기산리에도 보인다. 모두 특정 주민들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곳이라는 뜻이다. 264번지 일대이다.
■긴재·장현(長峴)
서내비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운암리 괘재고개로부터 시작하여 길게 이어진 고개이기 때문에 긴고개로 불리던 것이 긴재로 변하였고, 이것을 한자로 그대로 옮겨 장현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안동 권씨의 집성촌이다. 677-1번지 일대이다.
■낙락골·낙락동(樂樂洞)
긴재 북서쪽 봉암리와의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곳 양반들이 드넓은 하패리의 농지에서 생산되는 쌀을 가지고 농민들과 더불어 ‘농사천하지대본(農事天下之大本)’이라는 농가(農歌)를 부르며 희희낙락 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의령 남씨의 집성촌이다. 서남쪽에 태봉산이 있고 그 산자락에 병풍바위가 있다. 1071번지 일대이다.
■낙락골동쪽말
낙락골에서 흘러 내려가는 물을 막아 만든 낙락저수지가 해방 직후 완공되면서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낙락골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낙락저수지는 하패리의 광활한 토지를 수리안접답으로 만들기 위해 해방직후 이 지역 주민들이 만든 것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1051번지 일대이다.
■동촌(東村)
서내비의 여러 마을 중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서내비에서 따로 떨어져 동쪽에 생긴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377번지 일대이다.
■등두터
낙락골과 귀평의 중간산 자락에 있었던 마을이다. 옛날 낙락골과 귀평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지닌 재물을 도적질하였던 ‘등두령’이라는 산적두목이 살았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낙락골의 등 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등뒤골〉등두골로 불리다가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등두터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현재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 830번지일대이다.
■반월
서내비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동쪽으로 정자산을 등지고 있어, 다른 마을보다 달이 뜨는 광경을 수 시간 뒤에나 볼 수 있다. 옛날 정자산 정상에는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있어 마을사람들이 이 나무 밑에서 산신제 축원을 드리기도 하였다고 하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고 시름시름 앓다가 몇 해 전에 죽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달을 반밖에 보지 못한다 하여 ‘반월(半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운중명월(雲中明月)의 명당이 있는 곳에도 이러한 땅이름이 많다. 그러나 실제 서내비 인근의 마을 이름에는 달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모두들의 와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즉 들〉드리〉다리〉달로 변하면서 이것을 하늘의 달로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달을 뜻하는 ‘월(月)’로 표시한 것이다. 외딴말이라고도 한다. 534-2번지 일
대에 있다.
■봉황동 → 부엉데미
■부개미·부검동(富儉洞)
낙락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부유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사는 안동 권씨 마을이 부유해지면서 ‘부괴미’로 불리게 되어 부검동이 되었다고 한다. 903번지 일대에 있다.
■부엉데미
낙락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봉황동이라고도 한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사는 부자가 가을추수를 마치고 노적가리를 쌓아 놓았는데, 그곳에서 부엉새가 겨울을 나면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길렀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처에 있는 매봉재 및 부엉데미고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055-3번지 일대이다.
■살목·송촌·하송천(下松川)·아랫소래
서내비 남동쪽의 소래산 밑에 있는 시내 혹은 그 시내 옆에 있는 마을이다. 남양(南陽) 홍씨(洪氏) 집성촌이다. 송촌이란 땅이름은 송라산(松蘿山) 즉 소래산 밑의 시내 옆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송천(松川)이라 했던 것이 송촌으로 불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송천(下松川) 및 아래소래 역시 같은 뜻이다. 그런데 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신천이 마을 앞에서 갑자기 좁아드는데, 이곳에서 사람들 이 물길을 막고 고기를 맨손으로 잡았기 때문에 물살이 흐르는 길목이라는 뜻에서 ‘살목’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마을에는 조선 초기 개국공신이며 양근(楊根) 김씨의 시조인 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의 사당인 익화사(益和祠)가 있다. 15번지 일대이다.
■서내비·세네비·선업리(仙業里)
하패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주변에 신선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하패리 산99번지와 산98번지 능선에는 신선바위라고 불려지는 4∼5평정도 크기의 넓은 바위 세 개가 있다. 그 중 한 개는 몇 년 전 파괴되어 현재는 두 개만 남아있다. 일설에는 옛날에 어떤 선비가 활 쏘는 것을 업삼아 한량들과 함께 이 바위에서 세월을 보내며 놀았다는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근처에는 ‘한량논’이라는 땅이름도 있다. 대개 ‘세네비’로 불린다. 345번지 일대이다.
■아랫말
긴재마을에서 가장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긴재 중심에서 아래 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양주시에는 회천1동의 봉양동, 양주1동의 산북동, 양주2동의 광사동·고읍동, 백석읍 복지리, 은현면 운암리·도하리, 남면 신암리, 광적면 효촌리·석우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삼하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모두 일정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아래 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725번지 일대이다.
■양짓말
부개미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양지바른 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는 회천2동의 덕계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마전동·산북동, 양주2동의 삼숭동, 은현면 도하리, 남면 신암리·상수리, 장흥면 교현리·삼상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950번지 부근이다.
■외딴말 →반월
■월계마을[月溪-]
서내비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해나 달이 돋을 때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실제 서내비 인근의 마을 이름에는 달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모두들의 와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즉들〉드리〉다리〉달로 변하면서 이것을 하늘의 달로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달을 뜻하는 ‘월(月)’로 표시한 것이다. 154번지 일대이다.
■응달말
긴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응달진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는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2동의 덕계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마전동, 백석읍 가업리, 은현면 도하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교현리·울대리·삼상리에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응달이 진 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650번지 일대이다.
■턱골 → 기곡
■흑구모루·호구모루
부개미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을 오고가는 사람들이 산자락에 둘러 쌓인 이곳 모퉁이를 돌아나가다가 허깨비를 보았다고 하여, ‘허깨비모퉁이’라고 불리던 것이 발음이 변하여 헛구모루〉호구모루〉흑구모루로 변했다. 998번지 일대이다.
○갓바위 → 서덕바위
○갓바위산 → 쪽박산
○개구리바위
응달말 서쪽에 있는 바위이다. 개구리모양의 암수바위 두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고개를 쳐들고 있고 다른 하나는 고개를 땅에 박고 있는 모습이다. 남북방향으로 40m 간격을 두고 있다. 논 가운데에 있다. 350여 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 수호의 의미에서 개구리(혹은 두꺼비)바위 암놈과 수놈 한 개씩을 만들어 논에 두었다고 전한다.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개구리바위를 건드리거나 옮기면 재앙이 온다고 한다. 암수바위라고도 불린다. 양주시에는 회천1동의 덕정동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역시 개구리처럼 생긴 바위라는 뜻이다. 667번지에 있다.(장현마을 부근에 위치한 돌논에 있는 개구리 바위 중 숫놈은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상이 마치 개구리가 뛸 듯한 모습이다.)
○개미들기들
서내비 남동쪽에 있는 들판이다. 가뭄이 들면 개미들이 들끓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개미가 코를 골면서 들끓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물이 귀한 이 지역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땅이름이다. ‘갬두들기’라고도 한다. 291번지 일대이다.
○거지고개
낙랑골 동쪽 봉바위 산자락에 있었던 고개이다. 옛날 거지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며 봉암리 서원말과 하패리 낙락골의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구걸을 하였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 먹을 것이 없었던 시절에 이곳에 가면 훈련 나온 군인이나 미군에게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도 한다. 양주시에는 백석읍 홍죽리, 은현면 운암리, 남면 상수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808번지 부근이다.
○골논
월계부락 서쪽에 있는 논이다. 골짜기를 끼고 있는 기다란 논이라는 뜻이다. 양주시에는 회천4동의 옥정동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옥정동의 골논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논이라는 뜻이다. 228-1번지이다.
○공동묘지
서내비 북쪽에 있는 공동묘지이다. 산 전체가 묘지로 조성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인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묘지가 조성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산77번지에 있다.
○광제들
구레들 앞에 있는 넓은 들판이다. 넓은 들을 한자로 옮기면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753번지 일대이다.
○괘재고개·괘현(卦峴·掛峴)
운암리 구수고개에서 하패리로 넘어오는 고개이다. 운암리와 하패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나는 행인도 이 고개에서는 허리를 짚고 쉬어간다 하여 허리 걸 ‘괘(掛)’자를 사용하여 괘현이라 했다. 긴재 즉 장현(長峴)으로 이어진다. 990-3(도)번지 부근이다(자세한 내용은 운암리 괘현을 참조).
○굴바위
귀평, 즉 구레들 북쪽에 위치한 매봉재 산자락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에 너구리굴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모두 부수어져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양주시에는 양주1동의 마전동, 백석읍 가업리, 남면 상수리, 광적면 가납리·비암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모두 바위에 혹은 바위아래에 굴이 있다는 뜻이다. 산8번지에 있다.
○냉밑
구레들 남쪽, 광제들 건너편의 낮고 길게 뻗은 산기슭의 아래를 일컫는 말이다. 나지막한 산자락에 길게 뻗어 있는 이곳의 낭떠러지를 보고 구레들 사람들이 ‘낭떠러지밑’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낭밑〉냉 밑이 되었다. 744-1번지 일대이다.
○돌논
응달말 서쪽에 있는 논이다. 350여 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 수호의 의미에서 개구리(혹은두꺼비)바위 암놈과 수놈 한 개씩을 만들어 논에 두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논 한가운데 개구리 모양의 암수바위 두 개가 놓여 있는데, 하나는 고개를 쳐들고 있고 다른 하나는 고개를 땅에 박고 있는 모습이다. 남북방향으로 40m 간격을 두고 있다. 이 마을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개구리바위를 건드리거나 옮기면 재앙이 온다고 한다. 돌 논고래라고도 한다. 667번지의 논이다.
○돌논고개
돌논에서 낙락골을 거쳐 봉암리로 가는 길에 있는 나지막한 고개이다. 인근에 돌논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937번지에 있다.
○동쪽반고개
반월 북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반월마을에서 정자산을 지나 동쪽의 신천가에 펼쳐진 들판으로 넘나들던 고개이다. 반월 동쪽에 있어 동쪽 반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 산78번지 부근이다.
○말탁논
월계논 남쪽에 있는 논이다. 말로 타박하여 농사를 짓던 논이라 하여 말타박논〉말탁논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181-1번지 일대이다.
○매봉재
응달말 동쪽에 있는 산이다. 매모양의 큰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이 산에 매가 살았다고 하며, 일설에는 이곳에서 매사냥을 하였다고도 한다. 양주시에는 양주1동의 마전동, 양주2동의 만송동, 은현면 봉암리, 남면 매곡리·경신리, 광적면 광석리, 장흥면 부곡리·일영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산105-1번지 부근이다.
○박괴재
부개미마을 부근, 부검저수지 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부개미에서 응달말로 넘나들던 고개로 넓은 길이나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박고개라고 불리던 것이 박괴재로 변하였다. 부개미고개라고도 불린다. 944-2번지 부근이다.
○박석고개
구레들에서 현 상패초등학교 뒤 쪽을 넘나들던 고개이다. 예전에 이곳에 작은 돌을 깔아놓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현재 도구레들 사람들은 이 고개를 통해 상패초등학교 앞쪽에 넓게 펼쳐진 들판으로 다니고 있다. 동묘동산이라고도 불린다. 793-1번지에 있다.
○범대미
낙락골 북쪽에 있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사는 부자가 가을추수를 마치고 노적가리를 쌓아 놓았는데, 그곳에서 부엉새가 겨울을 나면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길렀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범이 새끼를 낳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잘못된 것이다. 부엉데미의 와전이다. 1055-3번지 부근에 있었다.
○병풍바위
낙락골 남서쪽, 낙락저수지에서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위치한 바위이다. 마치 병풍처럼 생긴 바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는 양주1동의 어둔동, 은현면 선암리·용암리, 남면 신암리·황방리, 장흥면 부곡리·삼상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모두 병풍처럼 생긴 바위라는 뜻이다. 산31번지에 있다.
○봉바위
부개미 서쪽 산자락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에 부엉새가 살았다고 하여 부엉바위라고 불리던 것이 봉바위로 변하였다. 산45-1번지에 있다. 한편 흑구모루 동쪽 산자락에 도봉바위가 있는데, 이것도 부엉새가 살았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산55-1번지에 있다.
○부개미고개 → 박괴재
○부엉데미고개
부엉데미에서 봉암리 서원말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사는 부자가 가을추수를 마치고 노적가리를 쌓아 놓았는데, 그 곳에서 부엉새가 겨울을 나면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길렀다고 하여 부엉데미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하패리와 봉암리 사람들이 이 고개를 통해 넘나들었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중공군 주력부대가 이 고개를 찾아 넘어 갔다고 한다. 최근 옛 고갯길 옆에 새로운 도로가 뚫리면서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다른 말로는 분투골고개라고도 한다. 이 고개를 넘어 처음 닿는 봉암리의 땅이름으로 분토동(分土洞:이곳에 있는 남세환묘의 묘지석에 분토동이라는 땅이름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음)이 등장하는데, 분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에서 분토골고개라 하던 것이 변하여 분투골고개가 되었다. 한편 이 고개는 선현(仙峴)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고려말 충신으로 남선굴에서 죽은 남을진의 묘소가 있는 서원말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산12번지에 있다.
○분투골고개 → 부엉데미고개
○산수완
집터골 남쪽의 골짜기이다. 무슨 이유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나지막한 산자락 안에 자리 잡고 있어 산속 안이라고 불리다가 이렇게 변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145번지에 있다.
○살구대이
월계마을 동쪽에 있는 논이다. 옛날에 이 들판에 살구나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말로는 살구재이 혹은 살구쟁이들이라고도 한다. 124번지 일대이다.
○살구쟁이들→ 살구대이
○색시바위
기곡과 서내비 사이의 경계 산자락에 있는 바위이다. 마치 치마폭처럼 펑퍼짐하게 생긴 바위라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산105-1번지에 있다.
○샘뜰
부개미 마을 인근, 부검저수지 남쪽에 있는 들판이다. 조그마한 샘이 있는 들이라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932번지이다.
○서덕바위
구레들 개울가에 있는 넓은 바위이다. 예전에는 이 바위에서 빨래를 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세탁바위’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서덕바위’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동두천시 상패동과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물가에 있다 하여 갓바위라고도 한다. 481-1번지에 있다.
○석죽거리
구레들 동쪽에 넓게 펼쳐진 들판이다. 병자호란 때 여기에서 말들에게 저녁죽을 먹였다고 전하여 온다. 하패리 구레들로부터 동두천시 상패동에 이르기까지 넓게 펼쳐진 들판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현재는 경지정리가 되어 있다. 495번지 일대이다.
○선현(仙峴) → 부엉데미고개
○소래산(蘇萊山)·소라산(蘇羅山혹은 所羅山)·송라산(松蘿山)
용암리 동쪽 평화로 국도변에서 보이는 높이 228.8m의 산으로 하패리·용암리·하패리에 걸쳐 있다. 소래산은 16세기 초반의 사실을 다룬 연산군일기 12년(1506) 2월2일조항에서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이밖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대동여지도(1861)를 비롯한 각종 지도와 경기도읍지 등에 소라산(所羅山)·소라산(蘇羅山)·소래산(蘇萊山)·송라산(松蘿山) 등의 명칭으로 쓰여져 왔다. 한편 세종실록 2년(1420) 3월 12일조항에서는 상왕, 즉 태종과 세종이 소라리(所羅里)에서 사냥을 구경했다고 했으며, 같은 책 19년(1437) 10월 2일조 항에서는 세종이 소라이(所羅伊)에서 사냥했다는 기사가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소라’라는 땅이름이 통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소래산 정상은 산136-1번지와 용암리 산14-1번지, 선암리 산2번지 경계부분에 있다(자세한 내용은 용암리 소래산 편을 참조).
○암수바위 → 개구리바위
○왕대골
산수완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무슨 이유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왕대는 쌀을 달리 부르는 말인데 이 골짜기에 논이 있으므로, 쌀을 생산하는 논이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147-1번지 부근이다.
○월계들
월계마을 동쪽에 있는 들판이다. 월계마을 앞에 있는 들판이라는 뜻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158번지 일대이다.
○장석바위
월계마을 남쪽의 소래산 자락에 있는 바위이다. 길이가 긴 바위가 있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산128번지에 있다.
○진재고래
양짓말 남쪽에 있는 들판이다. 흑구모루로부터 시작하여 응달말과 장현마을까지 이어지는 긴재 주위에 발달한 들판으로‘ 긴재에 있는 논고래’를 줄여 부르던 긴재고래가 변하여 진재고래가 되었다. 973번지 일대이다.
○집터골
월계마을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이 골짜기에 어떤 사람의 집터가 있었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145번지에 있다.
○쪽박산
서내비와 동촌 앞산 넘어 넓은 들판에 외떨어져 있는 산이다. 동쪽으로 신천이 흐른다. 마치 쪽박같이 아담하게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이 산 정상부근에는 바위가 있는데, 장사가 뜀박질한 발자국과 무릎꿇은 자국이라고 전해오는 흠이 나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갓바위산이라고도 하는데, 생김새가 마치 갓과 같아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혹은 소산(小山)이라고도 하는데 작은 산이라는 뜻이다. 70번지에 있다.
○태봉산
하패리와 운암리 및 하패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옛날에 태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우리에는 태를 보관한 큰 돌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석만이 남아 있다. 산30번지이다.
○텃굴고개
기곡, 즉 턱골에서 선암리 능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박석, 즉 얇은 돌이많이 깔려있어 박석고개라고도 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농로 확장으로 평평한 상태이다. 산 114번지에 있다.
(6) 도하리(道下里)
도하리(道下里)는 은현면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으로 용암리·선암리, 서쪽으로 남면 경신리 및 광적면 덕도리, 남쪽으로 광적면 석우리 및 가납리, 북쪽으로 운암리 및 남면 상수리와 접해있다. 도하리라는 땅이름이 문헌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은 일제초기이다. 이곳은 대한제국기까지만 해도 석적면(石積面)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적면 항동리(項洞里)·행동리(杏洞里)·대야지리(大也池里) 등 3개리에서 일부를 떼내어 은현면 도하리로 편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1912)과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나와있다. 도하리라는 땅이름은 도락산(道樂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도락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도하리에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락산 자락을 사이에 두고 살구골(행동)과 황골(항동) 등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아늑한 산촌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다만 도락산은 석재를 채취하면서 깊게 패이고 깍이어 흉물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어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가운데말
살구골의 양짓말과 응달말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혹은 안말이라고도 하는데, 이 또한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양주시에서 가운데말이라는 땅이름은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3동의 고암동, 양주1동의 산북동, 은현면 운암리에서도 확인되는데 모두 마을들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안말은 회천1동의 봉양동, 양주1동의 남방동·마전동, 은현면 운암리, 남면 신산리·상수리·황방리, 광적면 가납리·효촌리·덕도리, 장흥면 교현리·일영리에서도 확인되는데 모두 일정한 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447번지 일대에 있다.
■검준이
노가터의 북쪽으로 있었던 마을이다. 일부는 상수리와 이어져 있다. 원래 이곳은 남면 상수리와 은현면 도하리가 접해있는 지역으로 예전부터 상수리 쪽에는 마을이형성되어 있었고, 도하리 쪽에는 마을이 없었다고 한다. 534번지 일대이다(자세한 내용은 남면 상수리 금진리 참조).
■너머말·건너말
살구골안말에서 보았을 때 나지막한 산자락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풍류동이라고도 한다. 마을중심에서 산자락 넘어 쪽에 있다고 하여 너머말, 혹은 넘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건너말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안말의 건너 편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서 너머말이라는 땅이름은 남면 입암리에서, 건너말은 백석읍 복지리·가업리·홍죽리, 광적면 가납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삼상리·삼하리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일정한 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644-3번지 일대이다.
■노가터·노구메터
살구골 안에서 북서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노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며, 현재 용인(龍仁) 이씨(李氏)의 중시조 및 남양(南陽) 홍씨(洪氏) 중시조의 산소가 있다. 풀무터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이 마을에 있었던 나무 밑에서 마을사람들이 치성을 드렸기 때문에노구메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노구메는 산천에 치성을 드리기 위해 자유롭게 들고 다니면서 쓰던 놋쇠나 구리쇠로 만든 솥에 지은 밥으로, 이것을 가지고 드리는 치성을 노구메 정성이라고 한다. 현재는 모두 논밭으로 변했다. 502번지 일대에 있었다.
■뒷말
살구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청골이라고도 한다. 살구골의 중심인 안말에서 볼 때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471번지 일대이다.
■든지뚱
황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무슨 이유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두메산골 외딴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듬(두메)의 끝이 변하여 든지뚱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18번지 일대이다.
■사냥골
살구골 안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 골짜기에서 자주 사냥을 하였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431번지 일대이다.
■살구골·행동(杏洞)
도하리에서 가장 으뜸 되는 마을이다. 살구나무가 많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살구골의 한자식 이름인 행동(杏洞)이란 땅이름이 문헌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세기 후반이다. 호구총수(1789)에서는 이곳을 서석적면(西石積面)에 소재한 행동리로 소개하였다. 대한제국기에도 이곳은 행동리로 불리면서, 독립적인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적면의 항동리(項洞里) 및 대야지리(大也地里)와 함께 은현면 도하리로 편재되었다. 일설에는 고려시대에 행음사(杏音寺) 또는 행암사(杏岩寺)라는 절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운데말·뒷말·양짓말·응달말·너머말·사냥골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용인(龍仁) 이씨(李氏)의 종중 산소가 자리 잡고 있다. 447번지 일대이다.
■삼밭들·삼밭뜰·마전평(麻田坪)
살구골에서 동쪽으로 산을 넘어 있는 마을이다. 황골 남쪽에 위치한 이곳에 삼밭이 있었고, 아낙네들이 길쌈을 많이 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공장지대가 들어서 삼밭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모습도 많이 변하였다. 이 마을 뒤 도락산 자락에 애금바위가 있다. 265번지 일대이다.
■아랫말 → 황골
■안말 → 가운데말
■양짓말
살구골 중심에서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해가 제일 먼저 떠올라 가장 오래도록 비추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는 회천2동의 덕계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마전동·산북동, 양주2동의 삼숭동, 은현면 하패리, 남면 신암리·상수리, 장흥면 교현리·삼상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모두 햇볕이 드는 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577번지 일대이다.
■오리골
살구골 남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오얏나무가 많아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지금은 마을이 모두 없어지고 오리골저수지가 있을 뿐이다. 410번지 일대에 있었다.
■응달말
살구골 중심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해가 제일 늦게 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는 회천1동의 봉양동, 회천2동의 덕계동, 회천4동의 옥정동, 양주1동의 마전동, 백석읍 가업리, 은현면 하패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교현리·울대리·삼상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모두응달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437번지 일대이다.
■지청골 → 뒷말
■풀무터 → 노가터
■풍류동 →너머말
■황골·항동(項洞)·한동(漢洞)
삼밭들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구가 병목처럼 좁아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전쟁터였다고 한다. 항동(項洞)이란 땅이름이 문헌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은 대한제국기이다. 즉 이곳은 이미 위에서 설명한 살구골, 즉 행동(杏洞)과 마찬가지로 한일합방 이전부터 독립된 마을을 이루고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새롭게 은현면 도하리에 편재 되었다.한편 이 마을 입구에 있는 유자미묘의 묘갈명(1729년 세워짐)에는 이곳의 땅이름을 한동(漢洞)이라고 적고 있어, ‘큰골’이라는 마을이름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한동·항동 등으로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리고 이것이 변하여 황골이라고 불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다른 이름으로는 아랫말이라고도 한다. 양주시에는 회천1동의 봉양동, 양주1동의 산북동, 양주2동의 광사동·고읍동, 백석읍 복지리, 은현면 하패리·운암리, 남면 신암리, 광적면 효촌리·석우리, 장흥면 울대리·부곡리·삼하리에도 같은 이름이 확인된다. 모두 일정한 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78번지 일대이다.
○가리나무골·가리낭골·가래낭골
황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이곳에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3번지 일대이다.
○가마골
황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터골 바로 밑에 있다. 골짜기가 가마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검은골이 변하여 검은골〉거문골〉거먹골〉가막골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곳은 응달쪽에 해당하여 햇빛이 잘 비추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136번지 일대이다.
○개자리터
살구골 남쪽의 도락산 자락 가운데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무슨 이유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건너편 산자락에 활터고개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활터에서 사람이 들어앉아서 화살이 맞고 아니 맞음을 살피도록, 과녁 앞에 파놓은 구덩이를 개자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개자리가 있었던 터라 하여 개자리터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없어졌다. 341번지 부근이다.
○건너터
황골 서쪽에 있는 논밭이다. 황골마을 서쪽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산98번지 일대이다.
○검준이고개
살구골에서 검준이로 넘나들던 고개이다. 살구골 북쪽 산자락을 넘어 검준이로 가는 고개길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산76번지에 있다.
○고란골
황골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황골의 안쪽이라는 뜻에서 ‘골안’이라고 불리던 것이 변하여 고란골이 되었다. 122번지일대이다.
○광수재고개
살구골에서 삼밭들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고개길 중턱에 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다. 무슨 이유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광수(廣水)라는 한자 이름을 그대로 풀이하면, 예전부터 이곳에 물이 많이 고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산66-1번지에 있는 고개이다.
○군개
살구골 서쪽 들판에 있는 밭이다. 옛날에는 쓸모없는 땅이라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지만 현재는 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705번지 일대이다.
○긴골
삼밭들 동쪽 도락산 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길어 붙여진 이름이다. 진골이라고도 한다. 긴골이라는 이름은 양주시에서 회천1동의 봉양동, 백석읍 복지리·가업리·연곡리, 은현면 용암리, 남면 신암리, 장흥면 부곡리에서도 확인되며, 진골은 양주시에서 백석읍 방성리와 은현면 용암리에도 보인다. 모두 긴 골짜기라는 뜻이다. 286-2번지 일대이다.
○긴밭
너머말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밭이다. 기다랗게 생긴 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617번지 일대이다.
○깊이논
삼밭들 남쪽에 있는 논이다. 논의 골이 깊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공장지대로 모두 바뀌었다. 314번지 일대이다.
○느티나무
황골 노인정 앞에 있는 나무로 수령이 200여 년 되었으며 군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대상은 아니지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나무이다. 102번지에 위치한 노인정 앞에 있다.
○다래논밭
너머말 남쪽을 흐르는 하천변에 있는 밭이다. 예전에 다래넝쿨밭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629번지 일대이다.
○담비골
살구골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담비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490번지 일대이다.
○도락산(道樂山)·두락산(頭落山)·돌압산(突壓山·突押山)·
돌앞산·노락산 살구골 남쪽에 있는 산이다. 도하리 및 은현면 용암리, 백석읍 방성리, 회천2동의 덕계동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441m이며, 산세가 웅장하고 수목이 울창하다. 돌로 이루어 진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원래‘ 돌아 앉은 산’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돌앞산’이 되었다고 한다. 도락산은 18세기 중반의 문헌에서부터 확인된다. 해동지도(1760)는 돌앞산을 돌압산(突壓山)으로 소개하였다. 이는 돌앞산과 비슷한 한자를 빌어온 것이다. 한편 대동여지도(1861)와 대동지지(1864)에서는 돌압산의 한자를 ‘돌압산(突押山)’으로 바꾼 것이 특징이다. 신편 조선지지(新編朝鮮地誌,1924)부터는 도락산(道樂山)으로 소개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노락산이라고도 한다. 정상부근은 산39번지이다(자세한 내용은 ‘백석읍 방성리 도락산’을 참조).
○두배미
살구골 북쪽 세배미와 한배미 사이에 있는 논이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어 영좌배미라고도 한다. 514번지 일대의 논이다.
○멍에밭
너머말 서남쪽에 있는 논이다. 모양이 달구지나 쟁기 따위를 끌 때에 말이나 소의 목에 가로 얹는 멍에처럼 생겼다 하여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662번지이다.
○목캥이
황골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선암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양쪽으로산자락이 자리 잡고 있는 좁은 골짜기의 모습이 마치 짐승의 가늘고 긴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39-4번지 일대이다.
○박사터·박새터·박씨터
살구골 남쪽에 있는 터이다. 너머말 안에 있다. 옛날 박씨들이 이곳에 살았다고 하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박씨네가 살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43-1번지이다.
○번전들
살구골 서쪽에 있는 들이다. 논에서 밭으로 변하였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690번지 일대이다.
○벼락맞은골
삼밭들 남쪽 도락산 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벼락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석재 채취가 진행되면서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304번지 일대이다.
○벼락바위
삼밭들 남쪽 도락산 자락에 있었던 바위이다. 옛날에 한 여인이 아이를 바위 밑에 뉘어 놓고 김을 매는데, 큰구렁이(지네라고도함)가 나타나서 아이를 해치려 하였다. 이때 벼락이 쳐서 바위를 갈라지게 하고 구렁이를 죽였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양주시에는 은현면 봉암리와 광적면 효촌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모두 벼락을 맞은 것처럼 여러 개로 쪼개진 바위라는 뜻이다. 산39번지에 있었다.
○부흥골
운암리 물가배루니 앞에 상패천을 사이에 두고 건너 보이는 산이다. 옛날 이 산에 부엉이가 살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부엉골이 변하여 부흥골이 되었다. 산103번지이다.
○사마밭골
황골 남쪽의 도락산 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삼밭이 있었고, 아낙네들이 길쌈을 많이 한다 하여 삼밭골이라고 불리던 것이 변하여 사마밭골이 되었다. 현재는 공장지대가 들어서 삼밭은 없어졌다. 270번지 일대이다.
○사터산소골·사시산소골
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개인이 사적으로 잡은 묘소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61번지 일대이다.
○산제사터
삼밭들 동쪽 도락산 자락에 있는 터이다. 황골사람들이 매년 음력 9월 초하루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산제사를 지낸다. 산22번지 서쪽 끝자락에 있다.
○살구골못
살구골 남쪽에 있는 연못이다. 현재는 저수지가 되었다. 400-3번지 일대이다.
○새낭골·사냥골
삼밭들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산 사이에 틈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사냥골이라고도 한다. 양주시에는 양주1동의 산북동에도 사냥골이라는 이름이 확인되며, 광적면 가납리에는 새낭골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224번지 일대이다.
○성능
황골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홀거지 바로 남쪽이다.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는 논으로 누군가 새로 만들어 놓은 논(새논)이라는 뜻을 지닌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54번지에 있다.
○세배미
살구골 북쪽에 있는 논이다. 두배미보다 더 북쪽에 있다. 508번지 일대이다.
○안골
삼밭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삼밭들 안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양주시에는 회천1동의 봉양동, 백석읍 홍죽리, 장흥면 부곡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모두 일정한 지역을 기준으로 해서 안쪽에 있는 골짜기 혹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274번지 일대이다.
○앞자리
황골 바로 서쪽에 있는 논이다. 마을 앞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64번지 일대이다.
○애경바위·애금바위·애군바위·애기암·애기어머니
바위삼밭들 동쪽 도락산자락에 있는 바위이다.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큰 것은 숫바위이고, 작은 것은 암바위라고 한다. 바위에는 홈이 파져 있는데, 옛날 어떤 장수가 올라가면서 밟은 것이라는 발자국과 앉은 자리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특히 이곳에서 기도하면 아기를 낳는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아기를 못 낳는 사람들이 이 돌에 실을 묶어 놓고 기도 하면 아기를 낳는다는 것이다. 실제 이 바위는 감악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감악산의 정기를 받기 때문에 신통력이 발휘된다고 한다. 황골사람들은 이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있으며, 이 바위에서 치성을 드린 사람치고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산28번지에 있다.
○약수터
삼밭들 남쪽 도락산 자락에 있었던 약수터이다. 지금은 석재 채취 과정에서 사라지고 없다. 양주시에는 회천1동의 덕정동과 백석읍 복지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산39번지에 있었다.
○영좌배미 → 두배미
○이산소골
황골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이대장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의 산소가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14번지에 있다.
○잔디계논
살구골에서 너머말 남쪽에 있는 논이다. 산자락의 등성이에 위치한 논이라는 뜻에서 ‘산잔등이의 논’이 변하여 이렇게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645번지 일대이다.
○절터골
황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터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양주시에는 양주1동의 남방동, 양주2동의 삼숭동, 백석읍 방성리, 은현면 선암리·운암리, 남면 신산리, 장흥면 부곡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모두 절터가 있거나 있었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52번지 일대이다.
○진골→ 긴골
○큰고개
황골큰길에 서있는 느티나무에서 황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고개가 크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66-1번지 부근이다.
○큰골
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큰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에는 양주1동의 어둔동, 양주2동의 삼숭동, 백석읍 복지리·가업리, 은현면 용암리, 남면 경신리, 광적면 가납리·우고리, 장흥면 석현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모두 큰 골짜기라는 뜻이다. 60번지 일대이다.
○큰다래덤불
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함지박골 바로 동쪽이다. 큰골 안에서 다래덤불이 많은 곳이라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60번지에서 산14번지로 이어지는 골짜기이다.
○탑골
느티나무에서 황골로 넘어가는 큰 고개 부근에 있는 골짜기이다. 성황당이었던 돌탑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66-1번지 부근이다.
○태봉산
살구골 북쪽에 있는 산이다. 마을 사람들이 아이를 낳은 후 태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정상에는 헬기장 시설이 있으며 남면 상수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95번지와 상수리 산19-1번지에 걸쳐 있다.
○피난골
삼밭들 남쪽 도락산자락에 있는 골짜기이다. 광적면 가납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깊고 으슥해서 피난하기 좋아 붙여진 이름이다. 363번지 일대이다.
○한배미
살구골 북쪽에 있는 논이다. 492번지 일대이다.
○함지박골
황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큰골 안에서 함지박처럼 움푹 파인 모양의 골짜기 모습을 하고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67번지 일대이다.
○홀거지
황골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어떤 이유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부부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죽어 혼자 사는 사람들이 사는 외딴 곳이라는 뜻이 아닐까 추측된다. 산99번지에 있다.
○활터고개
살구골 남쪽에 있는 고개로 광적면 가납리로 넘나들던 고개이다. 옛날 근처에 활 쏘는 곳이 있었다 하여 붙여졌다. 양주시에는 백석읍 홍죽리, 은현면 선암리, 광적면 효촌리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모두 근처에 활터가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산48번지에 있다.
○활터고개너머밭
살구골 남쪽, 활터고개 너머에 있는 밭이다. 676번지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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