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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양주시 지명유래

by 고산마루(다올) 2012.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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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다가  은현면/상패동 유래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기에 잠시 옮겨왔다.

   상패동 내용중 간촌은 샘말, 곡촌은 골말을 가리키는 것 같으나 지금은 샘말, 골말을 합쳐서

   곡촌부락으로 부르고 있다.

 

■ 은현면 연혁

우리시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은현이란 명칭은 묵은과 현내의 이름을 따서 칭함

- 1957년 8개리로 편성

- 1964년 12개리로 조정(상패리1,2,3리 , 용암리 1, 2리, 하패리 1 · 2리, 도하리1,2리)

- 1980년 상패리가 동두천시로 편입되어 11개리로 조정

- 1984년 운암리가 1,2리로 분리 되어 12개리로 조정

(용암1,2,3리, 선암1,2리, 운암1,2리, 봉암리, 하패1,2리, 도하1,2리)

- 1999년 남면 한산2리 일부가 은현면 봉암리로 편입됨

 

지명유래

 

은현면

사천현이었다가 조선조에 현내면이라 하여 상패·중패·하패의 3개 리를 관할하였으며, 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묵은면·석적면·이담면의 각 일부와 남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묵은과 현내의 이름을 따서 은현면이라 하였음.

 

용암리

묵은 논이 많으므로 묵은논이 또는 진답·묵은동이라 하며, 묵은(진답)면사 무소가 있으므로 일패라고도 한다. 또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의 용바위가 있으므로 용바위·용암리이라하였음.

 

선암리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선들바위·선암이라 하였음. 또는 신선이 내려온 형상의 바위가 있다 하여 선암리이라 하며, '선들바위'가 있어 입석동이란 전설도 있음.

 

운암리

본래 적성군 남면의 일부 지역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입암리· 발운리와 양주시 묵은(진답)면의 삼패리·삼패하리·이패리 일부와 현내 면의 하패리 일부를 병합하여 발운과 입암의 이름을 따서 운암리이라 하였음. 혹은 구름바위가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함.

 

봉암리

봉바위가 있으므로 봉바위 또는 봉암리이라 하였음. 대부분 부엉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곳 또는 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지명임.

 

하패리

본래 양주시 현내면의 일부로서 옛날 사천현의 아래쪽 되므로 하패라 했음.

 

도하리

도락산 아래의 마을이라 도하동이라 함.

 

■ 상패동


가마소
고려 말엽에는 이 마을 입구에 가마솥 모양의 큰 연못이 있었는데,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어 주민들은 이 연못을 마음의 보물로 여기고 이 연못의 모양을 따라 부락명을 가마소라하였다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엽에 이 마을에 대 홍수가 들어 마을의 구조가 조금 변경되었는데 이 때 그 연못이 없어졌다고 전해 내려 오고 있으며, 연못이 없어진 이후에도 이 마을은 '가마소'로 계속 불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간촌(間村) 

이 마을은 부락의 북서(北署)에 위치한 미동(彌洞) 마을에 위치한 곡촌(谷村) 사이에 있다고 하여 미동(彌洞)을 포함하여 간촌(間村)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곡촌(谷村)

곡촌(谷村)은 가마소 고개 아래의 큰 계곡에 위치하였다 하여 곡촌(谷村)으로 불려지고 있다.


남산모루(南山)
남산모루(南山)는 동두천시 안흥동(安興洞) 뒷산인 마차산(磨叉山)이 남쪽을 막아 앉았다 하여 '남산'인데, 그 산모퉁이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남산모루'라 불려지고 있다.


사천(沙川)
조선시대 초엽에 이르기 까지 이 마을 앞을 흐르는 맑은 물속에 모래가 많이 떠내려와 사천부락(沙川部落)이라고 하였다는데, 이 마을에는 사천현((沙川縣)의 관터(사형장), 옥터 (징역살이), 광의(곡식창고)벌로 불리우는 속지명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선곡(仙谷)
선곡(仙谷)부락은 착하고 어진 선비가 많이 출생한 곳이라 하여 '선곡'이라 불려지고 있는데, 고려시대 말엽에는 이 부락의 북쪽산을 넘나드는 커다란 고갯길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 산을 넘어 다니는 통행인들이 많아 산마루에 통행인들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었으므로 부락명을 '성황당(城隍堂)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성황당은 흔적도 없어졌으나 마을 이름은 그대로 선곡으로 붙이어 오고 있다.


신촌(新村)
신촌(新村)은 구한 말 양천 허씨(陽川許氏)들이 모여 촌을 형성. 새말이란 말로 통용유래되어 있으며 6.25 동란 이후 부락민들의 이동이 많아지면서 급격히 변화된 부락명을 신촌(新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인곡(仁谷)
고려 말엽 이 마을에 어진 선비가 살았다 하여 인곡(仁谷)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며, 일명 인사적(仁寺蹟골)로도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 곳에 절이 있었다 하나 흔적은 없다.


정감부락(井甘部落)
정감부락(井甘部落)은 옛날에는 약수정이 있었는데, 물이 달다 하여 정감이라 하였고, 그 이름을 따서 정감부락(井甘部落)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참고>

 

동두천 지명유래

♣ 조선시대(세조 12년,서기 1466년) : 양주(楊州)가 목(牧)으로 승격되고 방리(坊理) 34개면중의 하나인 이담면(伊淡面)이 동두천시의 기원이 되었다. 초기에는 이담면(伊淡面)이 가정자리(柯亭子里)외 9개리로 구성되었다. 한일합방 당시 중심지인 가정자리(柯亭子理)가 동두천리(東豆川里)로개칭되었는데, 동두천(東頭川)은 내(川)의 이름을 딴 것이며, 하천이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있어 동두천(東頭川)이라 하다가 동두천(東豆川)으로 변하였다.

여기서 하천은 지금의 신천이 아니라 미2사단 기지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하천으로
소요산 공주봉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흐르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양주시의 지명 유래

1. 덕정리(德亭里)

1) 옛 덕정리 언덕에 정자나무가 있어 덕정이,덕쟁이,덕정동이라 하였다.

2) 현 덕정역 북방20m 지점의 낮은 구릉에 정자가 있어 유흥장으로 널리 이용되어 유산정이라 하였다. 그 러나 뜻이 부적합하여 '덕정'이라 개칭하였으며 덕정리로 변하였다.

3) 독(옹기)짓는 사람이 많이 살아서 '독쟁이'라 하였는데 한자음으로 덕정이로 바뀌었다.

4) 은골(隱洞) (1) 숲이 무성하여 어느 학자가 숨어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

(2) 조선시대 부락 남서편에 봉화가 있었다. 필요시 봉화사가 불을 지르고 불을 지르고 곧 은신하였기에 은동이라 부르다가 응골 은골이되었다.

 

2. 봉양리(鳳陽里) 봉양리의 지명은 봉명조양(鳳鳴朝陽)에서 따온 것이다.

-거무내미, 현암; 마을주변에 검은 바위가 있어 현암이라 하였고 우리말로 거미네미라 한다

-내촌동 ; 칠봉산 및 산속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 안골이 라 고 도 한다

-조골, 조휘동 ; 칠봉산 위로 이른 아침해가 돋으며 그 빛이 유난히 밝아 조휘동이라 하여 조골말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3. 회암리(檜岩里)

1) 옛 회암면 지역에 회암사가 있어 회암골 또는 회암동,회암이라 하였다

2) 전나무가 많고 천보산이 응결된 암석으로 되어 있어 회암이라 하였다.

- 노촌말 ; 노씨가 많이 살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서재말, 송현 ; 서당과 학당을 중심으로 향학열이 높은 지역으로 알려져 생긴이름이다.

- 회암령 ; 회암리에서 포천군 소홀면으로 가는 고개, 한국 전쟁후 미군들이 투바위고개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였다.

 

4. 율정리(栗亭里) 귀율리와 모정리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율정리라 하였다.

1) 귀루리 ; 양주밤의 원산지이며, 양주밤은 일찍이 중앙에 진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귀한 밤이란 뜻에서 귀율리라고 했고 음이 변하여 귀루리가 되었다.

2) 모정동 ; 마을 동구에 초모로 만들어진 정자가 하나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 옥정리(玉井里) 옥동리와 냉정리에서 각 한자씩 따서 옥정리라 하였다.

1) 마라니 ; 다음 세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 조선 태조가 도읍을 정하려고 다니던 중 이 마을에 들렸을 때 마이 땀을 많이 흘렸다 하여 붙여졌다.

- 조선초 효령 대군이 천보산에 수렵차 필마단창으로 역마를 달릴 때 여기서 말이 땀을 흘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서기675년 5만의 신라군과 20만 당나라 대군이 격전을 벌였을 때 신라장군의 천리준마가 싸움에 지쳐서 땀을 흘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 고암리(高岩里) 1914년 고장리와 어등산면 1리에서 일부를 떼어내어 고암리라 하였다.

1) 엄상골 ; 조선시대 이정승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기품이 엄하여 엄상동이라한다, 엄상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주원터 ; 옛날 지방 역노의 주막거리에서 주원동으로 불리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원으로 변칭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좋은 터가 변화된 것이라고도 한 다. 예전에 원이 있었던 동네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3) 독바위 ; 독같이 생긴 바위산이라 우리말로는 독바위, 한자음으로 옹암산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산의 위치가 우리나라 배꼽에 해당된다고 여기는 한편 천지개벽 때 마귀 할머니가 이곳에서 술을 빚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7. 회정리

1) 벌말,평촌 ; 새골,벌말,과골을 합한 자영부락, 마을앞에 넓은 들이 있어 붙여진 이름

2) 탑골 ; 아기를 낳지 못해 고민하는 젊은 여인의 꿈에 도승이 나타나 마을뒷산 고개 옆에 탑을 쌓고 치성하면 귀공자를 얻을 것이며 "뭇사람도 덕을 보리라" 하자 탑을 쌓아 생남생년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8. 덕계리(德溪里) 도덕리와 돈계리에서 각 한 자씩 따서 덕계리라 하였다.

1)도둔리 ; 옛날 반촌으로 도덕 군자가 사는 공이라 하여 도덕동이라 불렸다 한다. 도둔이라고 한다

2)돈계 ; 뒷산을 발원지로 하는 하천으로 바깥에서 보면 상류가 숨겨있어, '숨어있는 시내' 라 하며, 그밑에 자리 잡은 동네라 하여 돈계라 부른다.

3)방죽말 ; 조선말 저수지를 만들면서 붙은 이름이며 물막이 또는 방축동이라 하였다

출처 : 바른생활소년
글쓴이 : 이상훈 원글보기
메모 : 양주시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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